항목 ID | GC40002257 |
---|---|
한자 | 金銚 |
영어공식명칭 | Kim Jo |
이칭/별칭 | 김빈(金鑌),자화(子和),졸재(拙齋),공간(恭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구본욱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도관찰출척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김조(金銚)[?~1455]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졸재(拙齋)이다. 어릴 적 이름은 김빈(金鑌)이다.
[활동 사항]
김조[?~1455]는 1411년(태종 11) 동진사(同進士)에 합격하였으며, 1416년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하였다. 1425년(세종 7) 조정에서 각도의 관찰사에게 지리지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김조는 인동현감으로 재임 시 대구군사 금유(琴柔)와 함께 경상도관찰사 하연(河演)을 도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편찬하였다. 1425년 변계량(卞季良)의 천거로 집현전수찬에 제수되어 인동현감 임기를 마치기 전에 조정으로 올라갔다. 1446년 8월에 경상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하여 1447년 7월에 이임하였으며, 이후 예조판서와 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즉위년) 사망하였다.
김조는 대구군사 금유가 대구군 관아에 지은 금학루(琴鶴樓)의 기문을 지었다. 김조는 이 기문에서 “옛날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았다. 언자(言子)의 현가(絃歌)의 정치, 복자(宓子)가 탄금(彈琴)으로 교화한 것, 영천(潁川)의 정치로 말하면, 그 공효(功效)가 봉황래의(鳳凰來儀)에 이르렀으니, 옛 사람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여 목민관의 임무가 덕치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조는 ‘공간(恭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