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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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海君王 胎室 |
영어공식명칭 | Gwanghaegunwang Taesil|Placenta Chamber of King Gwanghaeg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구본욱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609년 11월 - 광해군왕 태실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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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611년 9월 30일 - 광해군왕 태실 수리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8년 - 광해군왕 태실 발굴 조사 |
현 소재지 | 광해군왕 태실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 |
성격 | 태실 |
관련 인물 | 광해군|안희|이호민|김상용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있는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의 태실.
[개설]
태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 아이의 태를 길한 곳에 묻던 곳을 말한다. 아이의 태를 소중히 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중요하다고 여겼고,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국운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광해군왕 태실(光海君王 胎室)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태실인데, 1609년에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조성된 가봉 태실(加捧胎室)이다. 가봉 태실이란,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추가로 석물을 올려 치장한 태실을 말한다. 광해군왕 태실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2018년에 발굴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광해군 15)]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경위]
광해군왕 태실은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 11월에 조성되었다. 태실의 조성은 대구부사 안희(安熹)[1551~1613]가 주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실상사(胎室上使) 이호민(李好閔)과 함께 태실부사(胎室副使)로 김상용(金尙容)을 대구로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다. 『광해군 일기』 1610년(광해군 2) 9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태실을 조성하고 나서 “돌에 틈이 갈라진 흔적이 많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611년 9월 30일 사헌부가 보고한 곳에 “대구부사 안희가 수토관(守土官)으로서 태봉(胎封)을 고쳤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구부사가 다시 태실을 수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치]
광해군왕 태실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654에 있다. 연경동에는 태봉마을이 있는데, 마을 뒤에는 태봉(胎峰)이라는 봉우리가 솟아 있고 마을 이름도 ‘태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태봉’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예부터 태가 묻혀 있다고 하여 붙여졌고, 예부터 묻힌 태가 바로 광해군의 것이었다.
[형태]
광해군왕 태실에 남아 있는 태실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태실비에는 ‘왕자경용아기씨태실(王子慶龍阿只氏胎室)’이라는 비제가 새겨져 있고, 파편에는 “만력 3년 1월 일 세움[萬曆三 一月 日 建]”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현황]
광해군왕 태실은 2020년 현재까지도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며, 안내판 외에는 별다른 보호 시설도 없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지역에는 왕과 관련된 유적이 드물다. 광해군은 비록 폐위된 왕이나 고증을 거쳐 복원한다면 문화유산으로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