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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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希道普通學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개교 시기/일시 | 1926년 7월 12일 - 희도보통학교 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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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55년 3월 28일 - 희도보통학교에서 대구종로국민학교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사립 희도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13[수동 101] |
현 소재지 | 대구종로초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49[서문로1가 1-5] |
성격 | 초등 교육기관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1902년에 안의와(安義窩)[James Edward Adams, 1867~1929] 선교사가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현 대구제일교회] 내에 대남학교를 세웠다. 1907년에 부해리(傅海利)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가 장인차(張仁車) 선교사의 부인 파커(Edith M. Parker)가 운영하였던 바느질반 소녀 14명을 인수하여 대구 선교지부에서 신명여자소학교[신명학교]를 세웠다.
대남학교와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독교 계열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두 학교 모두 학교 운영 자금이 부족하여 폐교 위기에 처하자, 1920년 대구 지역 유지인 서희원(徐喜瑗)과 박순도(朴順道)가 700원을 출연하여 학교가 유지되었다. 이때 두 기부자의 이름을 따 대남학교는 희원학교(喜媛學校)로, 신명학교는 순도학교(順道學校)로 교명을 바꾸었다. 1920년대에 교육열이 팽창하면서 불시에 학생 수가 52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결국 교실의 협소와 운영 자금의 부족으로 항상 폐교 위기에 처했다. 1919년 교장으로 취임한 김의균(金宜均)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여 기부금 1,700원을 모았다. 당시 서희원이 1만 원, 박순도의 후손 이규열이 1,000원, 김울산이 5,000원 등을 후원하였다. 이 기부금으로 대구부(大邱府) 수정(壽町)에 건평 254평 규모로 2층 양옥을 건축하였다. 대구 지역 학교 중에서 최초로 건축된 양옥이었다. 1921년 11월 25일 희원학교와 순도학교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에 걸쳐 학교 설립자 분쟁이 발생하여 학교 발전이 어려워졌다. 1926년 설립자가 김의균과 백남채로 변경됨과 동시에 희원학교와 순도학교를 합병하여 사립 희도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26년 7월 12일 오전 10시에 희도보통학교강당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1954년 3월 28일 대구 중구 수동에서 중구 향촌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55년 3월 28일 희도보통학교에서 대구종로국민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현황]
사립 희도보통학교의 터에는 희도맨션[중구 수동 101]이 들어서 있다. 아파트 명칭은 사립희도보통학교의 교명을 따 ‘희도’라 붙였다.
[의의와 평가]
희도보통학교는 근대 시기 대구 지역에서 근대 교육을 가장 먼저 실시한 교육기관이자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사립 교육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