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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07
한자 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大邱支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8년 8월 28일연표보기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10월 9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제1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타합회 개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12월 10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진주분회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9년 4월 26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김천분회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9년 7월 6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울진분회 결성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9년 7월 8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안동분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40년 12월 28일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대구대화숙으로 개편
성격 친일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일제가 조직한 친일 단체.

[개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大邱支部)는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을 수용하던 대구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로 1938년 8월 28일 결성되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민족운동 또는 좌익 운동에 관여하였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전향자 관리와 비전향자들의 전향 유도 및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산하에는 진주, 김천, 안동 등 12개 분회가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사상 전향자들을 관리하고 비전향자들의 전향을 유도하여 친일 사상을 고취하고자 결성하였다.

[변천]

1938년 8월 28일 결성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38년 10월 9일 제1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타합회(打合會)를 열었다. 1938년 12월 10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진주분회, 1939년 4월 26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김천분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 7월 6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울진분회, 1939년 7월 8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안동분회를 결성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40년 12월 28일 대구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38년 7월 24일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본부가 결성된 후 평양, 광주에 이어 3번째로 결성된 지부였다. 8월 13일 결성식을 열 계획이었다가 한 차례 연기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의 결성식장은 대구역대구공회당(大邱公會堂)이었다. 1938년 7월 24일 오전에 대구신사(大邱神社)를 참배한 후 오후 1시부터 결성식을 진행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의 지부장은 당시 대구 지역 최고의 친일 명망가인 서병조(徐丙朝)가 맡았고, 부지부장은 대구복심법원 검사국 검사이자 대구보호관찰소 소장인 사사키 요시히사[佐佐木義久]가 맡았다. 간사는 이상길(李相吉) 외 27명이었다. 참여 대표자는 김판권(金判權), 한세림(韓世林), 이삼문(李三文), 방한상(方漢相), 이동우(李東雨), 김수암(金水岩), 김명석(金明石), 윤장혁(尹章赫)[대구], 김기찬(金奇贊)[부산], 이봉술(李奉述)[동래], 송기호(宋畿鎬)[진주], 신말찬(申末賛)[김해], 김차룡(金且龍)[마산], 김석순(金錫舜)[하동], 이효종(李孝鍾)[영주], 전영경(田永璟)[울진], 윤사출(尹四出)[안동], 이칠성(李七星)[경주], 이홍기(李洪起)[예천], 이상길(李相吉)[영덕]이었다.

대구보호관찰소의 외곽단체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경상북도, 경상남도와 강원도 울진군의 사상 전향자를 망라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결성 후 관할 지역에 분회를 조직하였다. 1939년 12월 말까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에는 214명이 가맹하였으며, 산하에는 12개 분회[진주, 하동, 예천, 영주, 봉화, 김해, 부산, 김천, 울진, 경주, 안동 등]가 조직되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보호관찰소와 연계 및 협력하여 전향자들의 취직 알선과 비전향자들의 전향 유도에 나섰다. 또 군인 원호 행사, 신사 참배단 파견, 부여신궁(扶餘神宮) 건설을 위한 봉사 수양단 파견 등의 활동과 함께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을 선전·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1939년 3월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는 전향자의 봉사·수양(奉事·修養)을 위하여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조성 중이던 가시하라진구[橿原神宮]에 8명의 조선 대표를 파견하였는데, 대구지부에서는 김수암이 참가하였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39년 5월 28일 대구공회당에서 경상도 각지의 내빈 등 100여 명이 모여 지부 대회를 크게 열었다. 대회는 연맹원 확보, 지부 상임 간사회 설치, 연맹원을 위한 직업보도 기관 설치, 기관지 발행, 국채소화(國債消化)에 대한 협력과 실천, 방공 방첩(防共防諜) 연극·영화·강연회 개최, 황기(皇記) 2600년 봉축 행사 등으로 진행되었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39년 9월 1일까지 협의회 37회 개최[연인원 371명], 강습회 6회 개최[연인원 270명], 강연회 5회 개최[연인원 1,466명], 좌담회 25회 개최[연인원 564명], 신사참배 83회[연인원 663명], 근로봉사 11회[연인원 126명], 군사위문 23회[연인원 156명]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0년 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사상 전향 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재단법인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되었는데,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1940년 12월 28일 대구대화숙으로 개편되었다.

[의의와 평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는 일본제국주의를 위협하는 조선인 사상범을 관리하여 사상 통제 및 사상 전향을 유도한 친일 단체로 황도 정신의 앙양과 내선일체의 강화에 앞장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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