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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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軒長屋 |
이칭/별칭 | 빈민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최초 설립지 | 백헌장옥 -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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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빈민촌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표적 빈민촌.
[개설]
백헌장옥(白軒長屋)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표적 빈민촌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의 조선인과 언론은 백헌장옥을 ‘99간의 빈민굴’ 또는 ‘빈민굴’로 불렀다.
[구성]
백헌장옥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경북연구회가 발간한 잡지 『경북』에 따르면 1922년에 이미 계성학교(啓聖學校)[현 계성중·고등학교] 주변인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형성되어 있었다.
1922년 9월 기준 백헌장옥은 건축면적 290.4㎡에 네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고, 네 동이 86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구조였다. 백헌장옥에는 수도시설은 물론이고 우물도 없었다. 백헌장옥의 임대료는 1실이 1개월에 1원 20전이었고, 시장이 개설되는 날을 기준으로 매월 6회 나누어 냈다. 백헌장옥의 86실에는 64세대가 살았다. 백헌장옥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월수입은 5원 이내 15명, 10원 이내 31명, 20원 이내 17명, 20원 이상이 4명 정도였다. 곧 5원에서 10원 이내가 가장 많았다.
[변천]
1933년 백헌장옥에 화재가 발생하여 네 동 중 한 동이 소실되었다. 1934년 세 동만 남은 백헌장옥에는 57호(戶)에 320명 정도가 거주하였다. 백헌장옥의 건물 소유주는 김삼원(金三遠)이라는 조선인이었고, 토지소유자는 대구부회 의원이자 대구무진주식회사 사장인 소야원태(小野元太)라는 일본인이었다. 김삼원이 최호문(崔鎬汶)에게 백헌장옥 건물을 200원에 매도하기로 하자 백헌장옥 거주민은 쫓겨날 것이 두려운 나머지 각 세대 4원씩을 모아 최호문과 협의하여 240원에 되사기로 하고 토지소유자에게도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유자인 소야원태가 건물 매도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하고 동시에 대구지방법원 민사부에 건물 철거 신청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에 따라 김삼원과 최호문과의 건물 매매는 없었던 일이 되고, 김삼원은 소야원태에게 매도하게 되었다. 백헌장옥을 매수한 소야원태는 거주민에 대한 퇴거명령 소송을 대구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백헌장옥 거주민들은 법원에 진정서를 내는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소야원태와 매매계약을 통하여 건물을 매수하였다. 백헌장옥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거주 불안은 해소되었으나 소야원태가 평당 4전 5리였던 토지임대료를 평당 7전으로 올려 받으면서 생활난은 더욱 깊어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의 대표적 빈민촌이었던 백헌장옥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빈궁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