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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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遊廓 |
이칭/별칭 | 자갈마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도원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설립 시기/일시 | 1909년 11월 3일 - 대구유곽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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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대구유곽 - 대구광역시 중구 도원동 |
성격 | 성매매 업소 |
[정의]
1909년 대구광역시에 일본거류민단이 주도하여서 세운 성매매 업소.
[개설]
대구유곽(大邱遊廓)은 1909년 11월 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도원동 일대에 일본거류민단이 주도하여서 세운 성매매 업소이다. 일명 ‘자갈마당’이라고도 불린다.
[설립 목적]
대구유곽은 대구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풍기(風紀)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대구 지역에 유곽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세워졌다.
[변천]
대구유곽 설치는 1906년 11월 15일 대구도로위원회(大邱道路委員會)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대구도로위원회는 대구에서 거류 중이던 일본인들이 세운 단체이다. 대구도로위원회의 안건이었던 대구읍성(大邱邑城)의 ‘성벽 파괴 작업 청부의 건’을 논의하면서 대구유곽 설치가 처음 언급이 되었다. 대구유곽 설치에 대하여서는 찬반 논쟁이 일어났다. 이와세 시즈카[石瀨靜]와 같은 주류 세력은 유곽 설치를 찬성한 반면, 가와이 아사오[河正朝雄]를 비롯한 남문 위원은 유곽 설치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하였다. 제1차 ‘대구유곽 설치 찬반 논쟁’이었다. 유곽 설치를 찬성한 다수파는 성벽 철거 과정에서 나온 토사와 돌을 이용하여 북문 방면의 저습지인 도원동을 매립하여 유곽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제2차 ‘대구유곽 설치 찬반 논쟁’은 대구일본거류민단의 제1회 회의에서 발생하였다. 1906년 12월 24일 제1회 회의 안건으로 ‘대구유곽 설정’이 상정되었다. 가와이 아사오와 마스다 고타[增田虎太]만 도원동 유곽 지역 설정을 반대하였다. 가와이 아사오는 유곽 위치가 남문 밖 구릉지인 대봉정 방면[지금의 봉산동 일대]이나 산십제사공장(山十製絲工場)[지금의 대봉동] 동편 등에 세워지기를 기대하며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의 오카모토 리헤이[岡本利平] 부이사관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 한편 이와세 시즈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유곽 설치 장소가 애초 계획대로 도원동 일대여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1906년 12월 21일 민회의원(民會議員) 선거에서 찬성파이자 주류 세력인 이와세 시즈카 세력이 열한 명이나 당선되면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반면, 반대파에서는 가와이 아사오만 당선되었다. 유곽지 설치 논쟁은 결국 일본인의 이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구일본거류민단은 7,000평을 유곽지로 매수하여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대구일본거류민단의 재원에 충당하려고 하였다. 이와세 시즈카는 유곽 예정지 주변의 수만 평의 땅을 매입하여 시세 차익을 노렸다. 그렇지만 유곽지와 유곽 주변 땅의 시세가 오르지 않아 오히려 큰 손실을 입어 땅을 처분하였다. 1907년에 대구유곽이 조성되었지만, 유곽 경영을 희망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고, 1909년 4월 조건부로 민간에게 토지를 매각하였다. 결국 1909년 11월 3일 대구전매지국(大邱專賣支局)의 연초 공장 동편에 대구유곽이 세워졌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유곽은 2층 양옥집을 일정하게 지어서 1호집, 2호집과 같은 형태로 번호를 붙였다. 관에서는 ‘성병 예방 규칙’에 따라 유곽 한쪽에 성병 진료소를 의무적으로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현황]
대구유곽은 1947년 공창제도가 폐지된 뒤에도 세칭 ‘자갈마당’이란 이름으로 당국의 묵인 속에 영업을 계속하다가 설치된 지 110년 만인 2020년에 철거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유곽은 근대 개항기 대구부에 거류 중이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구 지역에서 설립한 최초의 성매매 업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