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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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時報[日刊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45년 10월 3일 - 『대구시보』[일간지]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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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49년 3월 23일 - 『대구시보』[일간지] 폐간 |
개칭 시기/일시 | 1953년 6월 1일 - 『대구시보』[일간지]에서 『대구일보』로 개칭하여 창간 |
최초 설립지 | 『대구시보』[일간지] 사옥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297 |
성격 | 지역 신문 |
[정의]
1945년 광복과 함께 대구에서 발행된 일간지.
[변천]
일제강점기 말 대구에 본사를 둔 일본어 일간지 『대구일일신문(大邱日日新聞)』, 『대구일보(大邱日報)』, 『조선민보(朝鮮民報)』가 지역신문으로 발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물자 부족을 이유로 ‘일도일지(一道一紙)’의 언론 정책을 강요함에 따라 『조선민보』와 『대구일보』가 『대구일일신문』으로 통합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윤홍렬(尹洪烈)·이인환(李仁煥)·이우식(李雨植) 등이 『대구일일신문』의 시설을 인수하여 1945년 10월 3일 『대구시보(大邱時報)』[일간지]를 창간하였다.
1946년 1월 2일 『대구시보』[일간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가 미군정청으로터 정간 조치를 당하였고, 1949년 3월 23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기사와 사설을 문제 삼아 이승만 정부가 강제 폐간을 하였다. 1953년 5월 여상원(呂相源)이 『대구시보』[일간지]의 시설 일체를 불하받아 1953년 6월 1일 지금의 『대구일보』를 창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시보』[일간지]의 발행인 겸 초대 사장은 윤홍렬이었고 인쇄인 겸 부사장은 이우백(李雨柏), 편집국장은 좌익 인사였던 최문식(崔文植)이었다. 윤홍렬이 1947년 2월 19일 사망한 뒤 장인환이 2대 사장이 되었다. 『대구시보』[일간지]는 배대판(倍大版)으로 발행하였는데 1면은 국내외 정치 기사, 2면은 사회·지방 기사를 실었다.
『대구시보』[일간지]는 1946년 1월 2일 미군정청으로부터 일주일 정간 조치를 당하였다. 광복 후 대구에서 발생한 최초의 필화사건이었다. 정간 처분을 받게 된 까닭은 『대구시보』[일간지]의 1945년 12월 31일자 신문에 경상북도청 직원들이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총사퇴하기로 결의한 것을 마치 당장이라도 사퇴할 듯이 보도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미군정청의 정간 명령서에는 “조선군정청의 프로그램은 조선 인민의 안녕을 위함이니 군정청을 방해하거나, 방해를 계획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다 불법이다. 『대구시보』[일간지]는 비사실적 기사를 공개하여 인민의 복리를 그르쳤으므로 정간이 마땅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구시보』[일간지]의 노동조합원들은 대구 9월총파업이 전개되던 1946년 9월 29일부터 파업에 돌입하여 신문 제작을 거부하였고, 1945년 10월 13일에는 신문사 직원들이 ‘신문 제작은 신문인에게 맡겨라’와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23일 『대구시보』[일간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가 정현모 경상북도지사의 명령으로 발간 허가가 취소되었다. 정현모 경상북도지사의 『대구시보』[일간지] 폐간 관련 발표에는 “고의적 인신공격, 허위 보도를 자행하여 정부 또는 정부 기관인을 모함하고 혹은 그 정책수행에 역행하는 언론을 공표하여 관민을 이간시키고 민심을 혼란케 한”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현황]
『대구시보』[일간지]는 1949년 폐간될 때까지 지역 언론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다가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신속 정확한 보도, 공정한 논평을 통하여 민주국가의 완성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1953년 창간된 『대구일보』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