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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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北救濟會 |
영어공식명칭 | Gyeongbuk Rescue Socie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5월 - 영남공제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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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2년 12월 - 영남공제회에서 경북구제회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영남공제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사회사업 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고아를 구제하던 관변 구호 단체.
[설립 목적]
경북구제회(慶北救濟會)는 고아 수용과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경북구제회는 1921년 5월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창립된 영남공제회(嶺南共濟會)로 출발하였다. 영남공제회는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친일단체 만주보민회의 총무로 활동하다 대구로 들어온 허주가 고아 수용과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영남공제회는 ‘영남공제회 고아원’으로도 불렸으며, 20명의 보육 아동을 수용하고 있었다. 1922년 12월 영남공제회는 경북구제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북구제회는 1923년 이후 매년 일본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에 일본 궁내성으로부터 사업 장려금을 하사받았다. 1926년 살타렐 재단[Fondation Saltarel]으로부터 건축비 1,000원을 지원받았고 1927년에는 은사재단 경복회(恩賜財團 慶福會)로부터 2,000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았다. 이후 1929년 300원, 1932년 1,000원의 보조금을 받아 고아, 미아, 기아 등을 보육하였다.
1943년 경북구제회의 회장은 정재각이었고 20여 명의 종사자들로 운영되었다. 1943년 경북구제회의 보육 인원은 원내 190명, 원외 35명이었다. 매년 평균 원내 231명, 원외 38명 정도였다. 보육 아동은 생후 1개월에서부터 16세까지의 고아, 빈아(貧兒), 미아, 기아(棄兒) 등이었다. 유아부(乳兒部), 유아부(幼兒部), 소년부, 소녀부 등 4부 5가족으로 나누고, 각 가족에 보모 여러 명을 배치하여 보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