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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징 상소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09
한자 都愼徵 上疏文
이칭/별칭 도신징 의례소(都愼徵 議禮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두

[정의]

1674년 대구 유생 도신징이 올린 의례 상소문.

[내용]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국은 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집권한 가운데 남인 세력이 견제하는 형태였다.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 세력은 서인 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남 유림의 공론에 의지하였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한 직후부터 서인과 남인은 왕실의 복제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였다[기해예송(己亥禮訟)].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가 아들 격인 효종을 위하여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가 쟁점이었다. 유교 예법에는 맏아들은 3년, 그 이하는 1년 입도록 하였다. 윤휴를 비롯한 남인은 비록 둘째이지만 왕통을 계승한 만큼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이 관철되어 국가의 복제[국제(國制)]에 따라 1년[기년복(朞年服)]만 입도록 하였다. 1666년(현종 7) 류세철(柳世哲) 등 영남 유생 1,000여 명이 송시열 예론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현종은 상소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왕실의 상복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1674년(현종 15) 2월 24일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서인 세력은 조대비의 상복 기간을 맏며느리인 1년이 아닌 9개월[대공복]로 정하였으며, 6월 4일 효종을 안치한 능 아래에 부장(附葬)하였다. 그런데 왕실 상복 논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7월 6일 승정원에서 몇 차례 거절당하였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1604~1678]의 상소문이 현종에게 올려졌다. 도신징은 “대왕대비께서는 마땅히 맏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국가 복제는 도리어 중서부(衆庶婦)[여러 며느리]의 복을 대공복(大功服)[9개월]으로 정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윤기를 전도시킴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논하였다. 며칠 뒤인 13일에 왕이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대신들 앞에서 도신징의 상소를 읽게 한 뒤, 고금의 모든 예법을 참고하여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게 하였다.

1674년 7월 17일 현종은 인선왕후의 빈소에 나가 서인의 주장에 의하여 결정한 대공복을 폐기하고 기년복을 결정하였음을 고하였다. 서인의 예론을 백지화하고 남인의 예론을 확정한 것이다. 갑인예송(甲寅禮訟)의 결과, 50년간의 서인 장기 집권 체제가 무너지고 남인 세력이 집권하는 정권 교체, 즉 ‘갑인환국(甲寅換局)’이 일어나게 되었다. 숙종 초기 집권 세력인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술환국으로 서인 정권이 재집권할 때까지 6년간 정국을 주도하였다. 관직도 없던 대구의 일개 유생이 올린 상소 한 장이 몰고 온 정치적 파장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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