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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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丘鎭 |
영어공식명칭 | Daegu-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대구광역시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 지방 군사 조직.
[개설]
1457년(세조 3) 조선 정부는 전국 각지의 요충지를 거진(巨鎭)으로 하여, 거진의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나머지 주변 지역의 진들이 거진에 소속되도록 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지방군 체제를 바꾸었다. 진관체제는 행정단위인 각 고을을 군사 조직인 진(鎭)으로 파악하고 각 진을 진관으로 편성한 전국 단위의 군사 체계였다. 즉, 진을 각 고을의 대소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 제진(諸鎭)으로 구분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각 고을 수령의 병마 직함이 규정되었다. 주진 당상관 수령은 ‘○○진 병마절제사’라 불렀고, 3품 수령은 첨절제사, 4품 수령은 동첨절제사라 불렀다. 행정권을 관장하는 관찰사는 여러 진의 병마관을 겸하는 수령들의 직속상관이었기 때문에 군사 면에서도 강력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경주부윤은 경주진 병마절제사를 겸하였으며, 안동진·대구진·상주진·진주진·김해진의 수령은 병마첨제사를 겸하였다. 조선 전기 진관체제에 의하여 전국의 국방 체제는 제도상으로 일원화되고 또한 유사시에는 각 진관을 중심으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등 제도상으로는 일원화되었다.
그 뒤 유사시에 각 고을 수령이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공동 대처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바뀌었으나 임진왜란 때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중에 진관체제를 재정비하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조선 후기 진관체제를 복구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진은 왜구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방군화한 중앙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변천]
1654년(효종 5) 삼남의 16영에 영장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경상도에는 6개 진에 전임 영장을 두었다. 중영(中營)은 대구부에 있었고 감영 중군이 중영장을 겸하였으며, 별중영(別中營)은 김해부에 있었으며 김해부사가 겸하였다. 전영(前營)은 안동부, 좌영(左營)은 상주목, 우영(右營)은 진주목에, 후영(後營)은 경주부에 있었다. 영장 파견 이후 영장 주관하의 훈련은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 동안 매월 한 번씩 하도록 하였다. 1665년(현종 6) 대구진영이 토포영을 겸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후기 대구읍성 안에는 경상감영을 가운데에 두고 서쪽에는 대구부 관아, 동쪽에는 감영 중군 소속의 중영이 있었으며, 동남쪽에는 대구진 소속의 진영이 있었다.
[현황]
1895년(고종 32) 7월 15일 칙령 제141호 ‘각 진영의 폐지에 관한 안건[各鎭營廢止件]’에 따라 대구진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