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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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博物館- 大邱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주요 박물관.
[개설]
국립중앙박물관의 홈페이지 주소는 museum.go.kr이며, 그 앞에 ‘대구’만 붙여 daegu.museum.go.kr를 검색하면 국립대구박물관 홈페이지가 나온다. 공통으로 나오는 museum은 세계 어디서나 박물관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와 음악의 여신 뮤즈(muse)의 신전을 ‘Museion’이라 부른 것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소장품들은 분명 인간이 눈부시게 이룩한 문화·예술·학문의 산물이지만, 그 수준이 워낙 우수하다 보니 신의 능력이 발휘된 것이 아닐까 놀랄 만하다는 점에서 museum의 어원은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다.
지역이 켜켜이 쌓아 온 역사의 성취물들을 한눈에 제시하여 주는 박물관은 그 도시의 수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가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박물관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은 관광자원의 차원과 문화복지의 측면 모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국립대구박물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번지 일원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시설이다. 1994년 우리나라에서 8번째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뒤쪽으로는 범어공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앞쪽으로는 수성구 청호로 6차로에서 박물관네거리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정문을 통하여 국립대구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맨 먼저 야외 공간이 아늑하게 맞이하여 준다. 정문 왼쪽으로는 5층석탑이 눈에 띄는데 칠곡 정도사 터에서 옮겨 왔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기 석탑이며, 아래층 기단부에 눈 모양 조각과 귀꽃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1031년(현종 22)에 국가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기둥과 문지방돌 등 유적이 전시되어 있는 정원 덕분에 국립대구박물관은 딱딱한 학술 공간보다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테마공원의 느낌을 더욱 풍긴다.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문화유산을 보존·연구하며, 전시·교육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국보 문화재부터 선사시대 유물까지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어 대구와 경북의 역사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3점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에는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 6점도 있어 2,000점이 넘는 유물들 중에서 국보와 보물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여느 박물관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물을 전시하는 것과 달리 주제별로 구성하여 놓았다. 가령 국립대구박물관에만 있는 섬유복식실은 왕실의 옷부터 무덤에서 출토된 옷까지 골고루 나열하고 있다. 대구광역시가 섬유 도시로 부흥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국립대구박물관에 섬유복식실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긴밀한 연계성을 지닌다. 왕실의 화려한 옷이나 규방에서 즐겨 입던 의복 등 옷을 주제로 먼 과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보니 우리 옷의 발전 과정을 색채 면에서, 직조 면에서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중세문화실은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특히 불교 문화재 가운데 세 국보인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龕)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될 정도로 섬세하고 유연한 선을 보여 준다. 보물로 지정된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漆谷松林寺五層塼塔舍利莊嚴具)는 사리를 보관하는 기능 외에도 미적인 면이 뛰어나 눈길을 사로잡는 유물이다. 보물인 금동 당간 용두(金銅幢竿龍頭)는 절 입구 20m 장대에 꽂아 놓은 것답게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눈에 띄게 서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은 신라의 토기와 가야의 토기를 비교함으로써 두 고대 국가의 흔적을 모두 찾아볼 수 있는 대구광역시의 지리적 이점을 살리고 있다. 신라의 토기는 주로 경주에서 유행한 것인데 그릇이 목과 다리까지 일자로 내려오고, 위아래 엇갈린 구멍이 뚫린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하여 가야의 토기는 위아래 구멍이 나란히 있고 곡선이 아름다우며 섬세하게 제작되어 있는데, 경상남도 김해시 등 남해안에서 출토된 것과 경상북도 고령군 등 내륙에서 출토된 그릇이 다른 점이 특징이다. 토기 가마 전시장이 따로 있다는 점도 국립대구박물관이 주제에 충실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지역 대학교 내의 박물관]
1959년 문을 연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국립대구박물관과 더불어 대구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대현동의 경북대학교 안에 있는 박물관이며, 보물로 지정된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大邱山格洞蓮花雲龍裝飾僧塔),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奉化北枝里石造半跏像)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화 운룡장식 승탑’은 일본인의 집 정원에 있던 것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고려 초기인 930년경 남한강 유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야외 전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의 대구 무술명 오작비 또한 이색적인데 발견 과정 또한 독특하다. 1946년 한학자 임창순(任昌淳)[1914~1999]이 대구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커다란 돌을 목격하였다. 길이만 해도 1m에 폭이 70㎝의 길가에 내놓은 돌이었다. 금석학자로서도 조예가 깊은 임창순은 돌에 희미하게 새겨진 한자를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유물임을 간파하였다. 임창순은 돌을 내다 놓은 집 주인을 설득하여 비석을 대학으로 가져와 새겨진 글자를 해석하였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글씨를 새긴 소박한 비석에는 삼국시대인 6세기 중엽 대구에서 저수지를 만든 과정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신라의 농업정책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고, 임창순은 피난을 다녀오게 되는데 전쟁이 끝난 뒤 경북대학교의 수영장 부근에 묻혀 있는 그 비석을 다시 발견하였다. 전쟁 와중에 주둔하였던 미군이 그 가치를 몰라보고 방치하였으나 임창순의 노력 끝에 ‘대구 무술명 오작비’라는 정식 명칭을 얻고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계명대학교의 개교 50주년에 맞추어 2004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의 성서캠퍼스에 행소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비교적 소담한 2층 건물이며 1층 특별 전시실과 2층 상설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川前里刻石)의 채색 모사도가 가로 10m, 세로 3m로 펼쳐진다. 울주 천전리 각석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암각화이며, 석기시대 이후 조각·그림·명문 등이 새겨져 있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인 탁본과 달리 암각화를 그대로 모사한 행소박물관의 작품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교에 재임한 암각화 연구가 장석호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암각 면에 실물 크기로 그린 것이다. 특히 기하학적 문양이나 글씨, 낙서 등을 각각의 다른 색깔로 표현하여 박물관 관람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행소박물관은 가야 유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명대학교가 있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은 경상북도 성주군, 고령군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이다. 성주군의 경우 『삼국유사』에서 6가야의 하나로 표현한 성산가야에 해당하고, 고령군의 경우 대가야의 핵심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행소박물관은 민화 15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교내에 한국민화연구소가 있어 민화 전시가 뛰어난 곳이다. 특히 용의 얼굴에 사슴의 몸, 말의 다리가 달린 기린이 나오는 ‘영수도’, 까치와 호랑이가 등장하는 ‘자수 호랑이’ 등이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지역 문화 수준의 잣대가 되는 대구광역시의 박물관들]
박물관은 지나간 과거를 가장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로서, 지역의 문화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로 기능하기도 한다. 가령 의료선교박물관(醫療宣敎博物館)은 대구광역시의 근대사를 생생히 보여 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내에는 의료박물관과 선교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대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 없는데 선교사들은 20세기 초 대구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등에 기여한 바가 크다. 지금도 계산성당 서쪽 청라언덕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지낸 집이 몇 채 보전되어 있다. 이 중 두 건물을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박물관에 들어가면 1800~1900년대의 의료기기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다. 선교박물관에 들어서면 각종 선교사들이 가져왔던 성경과 선교 유물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3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약령시는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 715m 길이로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 국책사업으로 문을 연 약재 전문 시장이기에 국내외에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 한눈에 그 현황을 들여다보기에 박물관만 한 곳이 없다.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은 1985년 문을 열었으며, 약령시의 역사와 약재의 효능, 그리고 한의학의 지식을 골고루 체험할 수 있다. 박물관은 2층 한방체험실, 3층 한방역사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한방역사실에 가면 대구약령시의 유래와 발전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약령시 역사와 문화존’이 있다. 여행의 피로를 풀어 주는 한방 체험이 다양하여 도보 여행자들에게 인기를 유지하는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의 마당에는 10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약초 족욕탕이 마련되어 있다.
한방역사실은 100여 년 전 대구약령시의 한약방과 주막 등을 재현하여 놓아 재미를 느낄 만하다.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는 흔히 북성로 공구골목이라 불리는데 현재까지도 공구 용품점 500곳이 몰려 있다. 6·25전쟁 후 피란민들이 대구로 몰려들고 미군부대에서 군수물자가 쏟아져 나오자 공구상이 늘어난 것이 시초였다. 1970년대 산업화 시기까지는 호황을 이루었으나 점차 인터넷 쇼핑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빈 점포가 더 많아졌다. 버려진 쌀 창고를 개조하여 2013년 문을 연 북성로공구박물관은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2018년 5월 ‘북성로기술예술융합소 모루’로 재탄생하였다. 모루에는 장인 작업장과 전시관, 창작 공간 등이 갖추어져 있다. 전시관에는 기존 공구박물관에 있던 전시품과 시민 기증품 100여 종 등 3,000여 점이 진열되어 있다. 모루가 여느 박물관보다 더 친숙한 점은 1층에 마련된 오픈팩토리 덕분이다. 전동드릴, 전동톱, 전동 대패 등 공구 일체를 갖추고 있어 누구나 예약하면 공용 작업 공간에서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박물관은 도시로, 도시는 박물관으로]
도심이 변모할수록 켜켜이 쌓인 역사가 보존되어 있는 박물관의 가치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대구광역시 또한 여러 박물관을 통하여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여가 시간이 증가하고 학생들의 체험 활동이 중시되면서 박물관의 다양성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는 근대골목투어를 통하여 지붕 없는 박물관을 추구한다. 근대적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 공간을 마치 박물관 공간처럼 보이도록 설정함으로써 100년 전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에 서 있음을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별된 대상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박물관처럼 근대골목투어의 이동 경로는 그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서사적 공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거대한 야외 박물관으로 설정된 근대골목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이 모든 거리가 응축된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들어서게 되며 근대골목 걷기 체험은 잘 짜여진 스토리를 획득하게 된다.
대구의 근대 도시 모습을 되살려 놓은 대구근대역사관은 이동 경로에 따라 국채보상운동, 3·1운동, 6·25전쟁, 2·28민주화운동, 산업화 시대를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네모난 외형부터 독특한 편인데 1932년 건립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르네상스양식을 본뜬 근대 건축물이며, 2003년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실제로 40대 전후의 대구 시민들은 ‘산업은행’이라고 하여야 금세 위치를 파악하고, 70대 노인은 ‘우체국 앞 조선은행’이라 하여야 인지할 만한 건축물이다. 2008년 대구도시공사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사들여 대구광역시에 기증하였고,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2011년 1월 개관한 것이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조선인에게 강제로 저축을 시켜 일본 군자금으로 공급한 대표적인 경제 수탈 공간이다. 서양식과 일본식이 절충된 건축양식이다. 아치형 창 위에 붙인 크림색 타일은 독일에서 수입한 장식 타일이었는데, 화려한 외관으로 우월감을 내비치려 하던 제국주의 일본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시실에 가면 조선식산은행의 금고를 직접 볼 수 있는데 육중한 3중 문 구조이며, 한 손으로 열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철문이 굳건하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이 건축되기 5년 전인 1927년, 폭탄을 제조하여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 한 장진홍 의사의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의 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체험실은 부영버스를 타고 대구의 옛 거리로 떠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에 대중교통수단인 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9년 7월이었는데 대구부가 직접 운영하는 부영버스였기에 대구 토박이 노인들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시간 여행을 선사하는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