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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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宗御前喜雨詩會人物圖[達城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126길 36[대일리 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창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달성 서씨 현감공파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인물화.
[개설]
효종어전희우시회인물도(孝宗御前喜雨詩會人物圖)는 1653년(효종 4)의 시회에서 장원을 한 달성 사람 용계(龍溪) 서변(徐忭)[1605~1656]에게 함께 내려진 시회 인물도이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자 효종이 친히 기우제를 지내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 이에 효종은 1653년 3월 17일 13명의 옥서신(玉署臣)[옥서는 홍문관의 별칭임]을 불러 희우시(喜雨詩)를 짓게 하여 그 시권(試卷)을 친히 비상(批賞)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이때 49세인 서변이 이 어전 희우시회에서 장원을 했고, 마안(馬鞍)[안장] 1부, 호피(虎皮) 1령, 호초(胡椒)[후추] 5근을 상으로 받았다. 13명의 옥서신은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좌명(金佐明), 우부승지(右副承旨) 변시익(卞時益), 도승지(都承旨) 이응시(李應蓍), 교리(校理) 이태연(李泰淵), 수찬(修撰) 김휘(金徽),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이회(李廻), 사서(司書) 이상진(李尙眞), 주서(注書) 정석(鄭晳), 예조 정랑(禮曹正郞) 서변(徐忭), 정자가주서(正字假注書) 신규(申圭), 학론가주서(學論假注書) 권륜(權륜),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홍연(李弘淵)과 정구(鄭球)였다.
참고로 1653년의 희우시회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652년 3월 17일 무자조에 "당시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상이 희우(喜雨)라는 제목으로 입직(入直) 중인 은대(銀臺)[승정원]·옥당·춘방(春坊)[세자시강원]·한주(翰注)[예문관]의 관원에게 오언 율시와 칠언 율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압운(押韻)은 '풍(豊)'과 '민(民)' 두 자였다. 대제학을 불러 등수를 매기게 하였다. 그 결과 수석을 차지한 수찬 김휘(金徽)에게 표피(豹皮)와 호초(胡椒)를 내리고, 사서(司書) 이상진(李尙眞), 주서(注書) 정석(鄭晳), 도승지(都承旨) 이응시(李應蓍), 승지(承旨) 이홍연(李弘淵)·김좌명(金佐明)·변시익(卞時益), 필선(弼善) 이형(李逈), 교리(校理) 이태연(李泰淵), 겸춘추(兼春秋) 서변, 가주서(假注書) 신규(申圭)·권론(權碖), 승지(承旨) 정유(鄭攸)에게 각각 차등있게 물건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효종어전희우시회인물도는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달성 서씨 현감공파 문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형태 및 구성]
장지(壯紙) 바탕에 윗부분에는 채색으로 시를 짓고 있는 사람들의 광경을 그렸으며, 아랫부분에는 시를 짓고 있는 시회 참석자 13명의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63㎝, 세로 57.4㎝이다. 주변의 경치는 생략하고 건물 안에서 이루어진 행사 장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였다. 행사 장면을 중심으로 양 옆의 건물은 생략하였다. 하지만 지붕 윗부분을 안개로 가리고, 기단 아래 마당이 약간 보이게 하여 확대되는 공간감을 암시하였다. 행사 장면은 실제보다 길게 그려진 기둥들에 의해 구획되어 있다. 누각 내부에는 산수도 5폭 병풍을 배경으로 연한 분홍빛 도포에 오사모(烏紗帽)를 쓴 13명의 옥서신이 시상에 골몰하고 있고, 2명의 시종이 이 모임을 돕고 있다.
[특징]
배경의 병풍에 그려진 산수화는 원경이 강조된 점으로 볼 때 16∼17세기 전반의 화풍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건물의 일부가 행사 장면의 틀을 형성하고 지붕 위를 안개로 가리는 방식은 1585년(선조 18)에 제작된 「선조조 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서울 대학교 박물관 소장]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1629년(인조 7)에 제작된 「남지 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서울 대학교 박물관 소장]에는 건물 내부의 행사 장면뿐 아니라 그 앞의 연못과 성벽의 일부까지 포괄해 담았다. 하지만 효종어전희우시회인물도는 행사 장면이 안개 속에서 드러나게 하여 자못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엿보인다. 이러한 구성을 비롯해 설채법(設彩法)이나 세부 표현 등으로 미루어 당시 화원(畵員)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효종어전희우시회인물도는 17세기 전반 기록화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인물과 문방구 등을 섬세한 기교로 묘사하고 화풍은 격이 높아 조선 후기 인물화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