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81
한자 心輸齋
영어공식명칭 Simsuja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고촌길 127-47[서변동 138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5년 - 심수재 중수
현 소재지 심수재 - 대구광역시 북구 고촌길 127-47[서변동 1382]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목조 와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관리자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이문성을 추모하는 재실.

[개설]

심수재(心輸齋)인천이씨(仁川李氏) 무태(無怠)[현 북구 동변동·서변동] 입향조인 태암(苔巖) 이주(李輈)의 아버지 소재(疎齋) 이문성(李文星)[1531~1571]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인천이씨 대구 입향조인 이문성의 고조할아버지 이말흥(李末興)은 경기도 광주에 살았는데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피하여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 정착하였다. 이문성은 1531년(중종 26) 파동에서 태어났다. 1565년 같은 마을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에게 아들 이주를 맡겨 계동정사(溪東精舍)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후 이주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과 교유하며 연경서원(硏經書院)에서 강학하여 대구 지역 유림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주는 1570년(선조 3) 가을에 부모를 모시고 무태로 이주하였고, 1571년 8월에 이문성이 사망하자 무태 대곡(大谷)에 장사지낸 뒤 아버지의 묘소 아래에 서실을 짓고 ‘대곡정사(大谷精舍)’라고 하였다. 이주가 사망한 후 대곡정사는 없어졌고, 이후 후손들이 재실을 짓고 심수재라 하였다.

[위치]

심수재북구 서변동 1382에 있다.

[변천]

심수재는 1975년에 중수하였다.

[형태]

심수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목조 기와집이다.

[현황]

심수재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에서 관리하여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인천이씨는 무태 지역에 터전을 잡은 후 대구 지역 유력 가문이 되었다. 이문성은 무태 지역에 처음으로 묘소를 쓴 인물이라 심수재인천이씨 문중의 재실 중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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