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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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原小京 |
영어의미역 | Gukwonsogyeong Administrative District |
이칭/별칭 | 국원,국원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창훈 |
[정의]
신라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설치된 행정구역.
[개설]
6세기 중엽 신라의 진흥왕은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며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동북쪽으로는 함경도의 마운령과 황초령, 서북쪽으로는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였다. 557년(진흥왕 18)에는 고구려가 장악했던 국원, 즉 충주 지역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귀족 자제와 왕경(王京) 6부(部)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소경으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멸망한 대가야의 귀족 세력들도 다수 이주된 것으로 보인다. 우륵이나 강수는 바로 그러한 가야계 인물들이었고, 충주 지역의 문화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경덕왕대 전국의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757) 명칭이 중원소경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중원이란 명칭으로 변경된 후에도 국원이라는 표현이 사료에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 말까지도 공식적인 중원소경이라는 명칭 이외에 지명으로서 국원이란 이름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940년(태조 23)에는 충주로 변경되어, 그 이름이 현재까지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국원소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주 지역이라는 점만 분명할 뿐 성곽으로 둘러싸인 중심지, 즉 치소(治所)가 어디였는지의 문제는 여러 가설이 있을 뿐 확인하기는 어렵다. 기록도 단편적으로 전하고, 유적이나 유물도 위치를 명확하게 증명할 만한 결과물은 없기 때문이다.
국원소경과 중원소경은 명칭만 바꾼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같은 위치일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의 국원성과 신라의 소경이 같은 위치일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지 않다. 치소의 위치에 대한 부분도 장미산성, 탑평리 중앙탑 일대, 충주 시내 봉현성 터 등으로 여러 견해가 제시된 상황으로 위치 비정에 관한 이러한 점들은 향후의 과제이다.
[제정경위 및 목적]
충주 지역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일대를 장악한 신라가 한반도의 중심부로 세력을 확장할 때 거점이 되는 곳이다. 신라의 북진은 죽령을 넘어 단양을 거점으로 삼거나 계립령을 넘어 충주를 거점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하지만 단양을 넘어도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충주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한강 수계를 이용한 물자와 인력의 운송 통로로 충주 지역은 가장 핵심적인 거점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신라는 이 지역을 장악한 후 왕경에 버금가는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소경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국원소경의 구체적인 설치 목적과 관련해서는 가야로부터 이주된 지배층을 회유하고 감독하기 위해서라는 견해나 진흥왕의 북진정책 근거지이기 때문이라는 견해, 신라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분리시켜 공동체적 유대를 단절하여 재기를 방지하고 그곳을 중앙집권체제하의 직할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하지만 특정 견해가 주요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국원소경이 설치된 배경과 목적은 거론된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만큼 충주 지역은 당시 삼국간 경쟁과정에서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557년(진흥왕 18)에 국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이듬해 봄 2월에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 때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으며,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을 비롯한 충주의 연혁을 언급하고 있는 사료(史料)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우륵이 신라에 투항하자,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에 살게 하고, 주지(注知)·계고(階古)·만덕(萬德)을 보내 배우게 하였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