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A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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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순하 |
광주이씨가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 것은 광주이씨 선조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증손되는 좌통례(佐通禮) 이극견(李克堅)이 약 500여 년 전 성주목사가 되어 내려올 때 둘째 아들인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는 그 후 팔거현(八筥縣)[칠곡의 옛 이름]에서 가법을 지키는 최하(崔河)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아버지 이극견이 내직인 좌통례직(佐通禮職)을 제수 받아 한양으로 올라갈 때 부인의 고향인 팔거현, 즉 칠곡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승사랑 이지는 이렇게 팔거현(八筥縣)에 남아 있음으로써 이극견은 물론이고 숙질간 수십 명이 하루아침에 참화를 당한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를 피함과 동시에 칠곡(漆谷) 광주이씨의 입향조가 된다.
이지의 현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寒岡) 이정구(李鄭逑)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문명이 높았다. 인조 때는 공조참의를 역임하다 사후에는 성주의 회연서원(檜演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회령의 오산서원(鰲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이윤우의 둘째 아들인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 두 분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역시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부응교와 사간원사간을 역임하였고, 좌찬성과 양관(兩館) 대제학의 증직을 받았다.
이도장(李道長)의 장남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셨고, 증영의정시문익(贈嶺議政諡文翼)을 받았다. 또한 차남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綠)은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원정의 장남인 정재(靜齎) 이담명(李聃命)은 이조참판과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차남 이한명(李漢命)은 홍문관교리를 역임하는 등 4대(四代)가 한림(翰林)을 지낸 조선시대에서도 드문 명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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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곡 이원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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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신도비
매원에 입향한 광주이씨는 석담 이윤우와 그의 두 아들, 곧 이도장(李道長)과 이도장(李道章) 형제이다.
세 사람은 처음 웃갓마을로 이거하였는데, 후에 이원례의 후손들은 경북 봉화 부근으로 이거하였고, 귀암 이원정은 양주목사 시절 신기제택(新基第宅)으로부터 귀바위[일명 이암(耳巖)]로 이거하여 매원은 이원록과 도장공의 후손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매원에서 성장한 귀암 이원정은 연속해서 다섯 차례나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하고, 문과아원(文科亞元)을 하였으며, 동생인 이원록 역시 생원시 장원과 문과 을과아원(乙科亞元)으로 우제(友第)하였으며, 동생 선교랑 이원례 역시 향시(鄕試)에서 장원하였다. 이원정의 장자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역시 문과에서 아원(亞元)을 하였으니 이는 모두 매원마을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런 이유로 한때 매원을 장원방(將元坊)이라 불렀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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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곡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