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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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의미역 | Costum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의 일반 복식 생활.
[평상복]
남성의 전통 복식은 저고리, 바지, 대님, 마고자, 조끼, 두루마기로 구성된다. 저고리와 바지는 계절에 따라 겹저고리와 겹바지 혹은 홑저고리나 홑바지를 입었다. 홑저고리의 재질은 모시, 안동포, 옥양목이었고, 겹저고리의 재질은 주로 명주를 사용하였다. 홑바지는 주로 무명, 모시, 생모시, 안동포로 만들었고, 겹바지는 무명, 명주, 옥양목 등으로 만들었다. 남성의 경우 저고리 위에 비교적 고급 재질의 조끼와 마고자를 입었으며, 화려한 단추로 장식하였다. 외출용 겉옷으로는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여름용은 모시, 안동포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무명과 옥양목으로 만들었다. 작업복은 여름에는 삼베로 만든 고쟁이나 핫바지에 삼베홑적삼 또는 등걸이를 입었고, 겨울에는 누빈바지에 솜저고리를 주로 입었다. 비나 눈이 올 때에는 삿갓이나 도롱이 등의 우장을 사용하였다.
여성의 전통 복식은 저고리, 치마, 속곳, 버선 등이 있다. 저고리는 남성복과 마찬가지로 겨울철에는 겹저고리, 그 외 계절에는 홑저고리를 입었다. 겨울용 겹저고리는 솜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치마는 풀치마와 통치마를 주로 입었다. 통치마는 외출용으로 평상시에는 잘 입지 않았으며, 여름용으로는 모시나 안동포로 만들었다.
여성의 작업복에서 대표적인 것은 무명으로 만든 앞치마이다. 여성들의 경우 별도의 작업복을 장만하기보다는 일상복이 곧 작업복인 경우가 많았다. 작업복은 주로 삼베나 광목을 조각조각 꿰매어 만들었다.
처녀들의 저고리는 연두색 치마에 분홍저고리 혹은 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주로 입었다. 그러나 서민층에서는 일상복이 작업복으로 대용되었기 때문에 물감을 들인 옷을 입는 경우는 드물었다.
칠곡군에서 전통복식은 대부분 민가에서 직접 재료를 구하고, 직접 바느질을 해서 장만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재봉틀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재봉틀이 보급되기 전에는 바느질은 여성이 습득해야 할 필수적인 기술의 하나였다. 바느질에 필요한 바늘, 실, 바느질 상자, 실패, 바늘쌈, 가위, 골무 등은 여성의 주요 혼수품이었다.
[의례복]
칠곡군에서 출생의례와 관련된 복식에는 신생아가 초칠일, 이칠일, 삼칠일날 입는 옷과 이후 백일, 돌날에 입는 옷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배냇저고리를 입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입던 헌옷을 재료로 하여 만들며 무명이나 광목을 재료로 하였다.
아이가 태어나서 백일이 되면 성인의 복식과 같은 형태로 저고리를 만들어 입혔으며, 바지는 입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상류층에서는 색동저고리를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 돌날에는 돌복이라 하여 저고리, 바지, 타래버선과 무명이나 명주로 만들어 복자나 꽃무늬를 놓은 돌띠를 착용하였다. 돌날 사내아이에게는 남바위를 씌우고, 계집아이에게는 색동저고리와 치마를 입히고 이삭머리를 땋아서 댕기를 매어주었다.
혼례시에는 남녀의 구분이 뚜렷한 예복을 입었다. 전통 혼례 때 신랑은 사모관대를 갖추고, 신부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신랑은 사모관대 속에 솜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고, 신은 주로 목화를 신었다. 바지와 저고리는 보통 흰색이나 옥색으로 하였다. 신부는 다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주로 입었으며, 그 위에 원삼이나 활옷을 입었다. 치마는 홍색이나 분홍색의 겉치마였으며, 발에는 흰색 솜버선에 당혜나 고무신을 신었다.
초상을 치를 때 입는 예복으로는 상주가 입는 상복과 친척이나 상례일을 돕는 사람이 입는 복옷이 있다. 남자 상주들은 광목으로 만든 바지저고리에 삼베중단을 입고 제복을 입는다. 이는 삼베조각을 여러 곳에 붙여 만든 옷으로 너데기옷이라 한다. 허리에는 요지를 매며, 종아리에는 행전을 차고, 짚신을 신으며, 굴건을 쓰는데, 이를 굴건제복이라고도 한다. 여자 상주는 치마저고리에 짚으로 엮은 수질을 머리에 쓴다.
전통적 상례를 치를 경우 삼년상을 지낼 때까지 상주는 상례 당시에 입었던 상복을 입었다. 이후에는 기제사 때 남성은 유건과 도포를 착용하였으며, 여성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수의]
수의는 상례의 절차인 염습할 때 시신에게 입히는 옷이다. 과거에는 습의(襲衣)와 염의(殮衣)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염습제도는 중국의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주자가례』가 염습제도를 포함한 상례의 기준이 되었다. 그동안 출토된 복식을 통해 조선시대 수의를 살펴보면 중기까지는 평소 상용하던 의복이나 새로 장만한 의복을 사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염습의 용도로 수의를 만드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칠곡군 북삼읍 인평리 벽진이씨 문중 민묘에서 출토된 수의는 단단령(單團領), 유직령(襦直領), 유협주음의(襦脥注音衣), 납협주음의(衲脥注音衣), 유방령의(襦方領衣), 납바지, 협바지, 소매, 이불, 모자(帽子), 멱목(幎目), 악수(握手) 등 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수의를 비롯한 유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합장묘가 아님에도 여복바지가 출토되어 매장자가 기혼자일 경우 배우자의 옷을 부장품으로 넣는 오래된 장례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의 재료로 교직물을 사용하였다는 것, 매장자가 생전에 사용한 의복이라는 것 등을 통해서 당시의 의생활을 살필 수 있다.
[옷감]
전통 복식의 주요 옷감에는 삼베와 무명이 있으며, 고급 옷감으로 명주가 있다. 칠곡군 지역에서도 전국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옷감의 장만은 주민들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삼베와 무명의 생산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베는 삼을 파종하여 수확한 뒤, 껍질 벗기기, 삼째기와 삼삼기, 실삶기, 베날기, 베매기, 베짜기의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다. 베를 짜는 과정에서 베틀을 사용하였다. 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삼을 삶는데, 이를 삼주지라 하였다. 삶은 삼은 식기 전에 껍질을 벗겨 단으로 묶어 건조시킨다. 건조한 삼은 물에 축여 짼 다음 삼을 잇는 삼삼기를 한다. 다시 건조한 삼은 양잿물과 함께 삶아 색깔을 낸다. 베를 낸 다음에 실올에 풀칠을 하는 베매기를 하고, 베틀을 이용하여 베를 짜낸다.
주로 겨울용 옷감으로 사용한 무명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짠 것이다. 무명 역시 파종에서 수확의 과정을 거쳐 실잣기를 통해서 생산되었다. 파종은 3월에 하며, 8월에 꽃이 피고 열매가 터져 목화가 된다. 따서 말린 목화는 쐐기에 앗아 씨앗을 빼고 솜을 타게 된다. 솜이 된 목화는 고치를 만들고, 물레에 가락을 끼워 실을 잣는다. 무명의 생산에 따르는 전 과정도 삼베와 마찬가지로 각 가정에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의복 관리]
전통 의상을 장만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바느질, 세탁, 다듬질, 다림질을 하였다. 바느질은 옷감에 따라 사용하는 종류가 다르다. 명주는 세침, 광목류는 중침, 삼베나 이불은 왕침을 사용하였다. 바느질 방법에는 시치고, 공그리고, 누비고, 감치고, 호는 방식이 있다.
세탁에는 ‘아시빨래’라 하여 속옷류와 삶지 못하는 옷을 한 번만 세탁하는 것과 ‘두벌 빨래’라 하여 겉옷이나 때가 많이 묻은 옷을 아시 빤 후에 양잿물에 삶아 다시 세탁하는 방식이 있다. 세탁한 옷들은 속옷류를 제외하고 밀가루와 밥을 이용하여 풀을 먹였다. 건조한 세탁물은 손질해 밟은 후 다듬이질을 하였고, 다듬이질을 마치면 다리미나 사기종지, 사발로 문지르는 다림질을 하여 구김살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