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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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校 |
영어의미역 | County School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갑규 |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지방 관학 교육기관.
[개설]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한 각 향교(鄕校)에는 반드시 문묘(文廟)가 설치되어 있다. 문묘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경전(經典)속의 선성(先聖), 선현(先賢)에 대하여 존모(尊慕)의 예를 표할 수 있도록 설치했고, 존모의 예로 춘추에 석전(釋奠)을 거행한다. 석전은 ‘석채전폐(釋菜奠幣) 나물을 놓고 폐백을 드림’의 줄임말이다. 또한 대체로 공자를 중심으로 4성(四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모신 문묘를 중설위(中設位)라 하였다. 여기에 공자의 72제자와 한·당·송·원의 선유(先儒)까지 합하여 모신 곳을 대설위(大設位)라 하였다. 현재는 1949년 6월에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여 공자(孔子)와 안연(顔淵),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을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설위(小設位)이다. 전국 향교가 이에 준하여 문묘제례 즉 석전(釋奠)을 올리고 있다.
[칠곡향교]
『칠곡읍지(漆谷邑誌)』학교조에는 ‘향교가 군북(郡北) 1리에 있다’는 말뿐 창건 연대와 변천사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 칠곡은 지리적으로 본래 성주에서 분할되었다. 달성군과 인접하여 동으로는 팔공산, 남으로는 금호강, 북으로는 가산이 솟았고 서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1981년에는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칠곡향교는 대구시의 관할로 들어갔다.
[인동향교]
1914년에 인동군(仁同郡)을 합하여 칠곡군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인동향교가 칠곡군 관활로 들어와 있었다. 『인동읍지(仁同邑誌)』학교조에는 검성하(儉城下) 성황지(聖隍池)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안태동 옥산(玉山) 북으로 이건하였고, 1634년(인조 12)에 옥산하로 이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인동향교 역시 인동군이 구미시로 편입되면서 구미시의 향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현 행정구역상의 칠곡에는 향교가 없어진 셈이 된다.
[현대적 계승]
명의상으로는 칠곡향교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시에 편입되어 있는 칠곡향교의 경우, 칠곡군 인사들의 혼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칠곡향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소설위(小設位)이며 매년 춘추로 석전(釋奠)을 올리고 있다. 1950년 이후 칠곡중학교를 설립하여 현대적 교육 계승에도 앞장선 곳이다. 향교 명륜당에는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주역들이 계속하여 지금도 전통교육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칠곡향교의 기록문]
「칠곡향교 명륜당 중수 취지문」에는 “칠곡향교 대성전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수리가 되었으나, 강당인 명륜당은 부속 건물로 수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칠곡유림은 이에 분발, 단합하여 자진하여 희사한 성금으로 강당을 수리하였다. 그 경위를 1991년 3월에 유도회 칠곡지부장 이우탁(李愚卓)과 이종상(李鍾商)이 찬(撰)하여 취지문이란 글로 남긴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칠곡향교중수기」에는 “위의 사실에 대하여 당시의 전교(典校) 이도상(李道祥)이 한문으로 상세하게 기문(記文)을 남긴 것이다. 당시에 활약한 장의(掌議)는 다음과 같다. 송일선(宋一善), 장기수(張基守), 한정석(韓正錫), 정문흥(鄭文興), 이장세(李長世), 차진국(車鎭國), 조민환(曺玟煥), 김재필(金再弼), 이상환(李尙煥), 이태환(李泰煥), 정용규(鄭鏞奎), 유지엽(柳志燁), 이종로(李鍾露), 유기우(柳基雨), 이종석(李宗錫), 이종선(李鍾選), 이대기(李大基). 감사: 이연수(李然秀), 이석재(李錫在).”라고 되어 있다.
이 밖에 「칠곡향교중수기적비(漆谷鄕校重修紀績碑)」에는 “위의 사실을 전 전교(典校) 이우동(李愚東)이 찬(撰)한 비문으로 돌에 새긴 글이다.”,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에는 “위의 사실을 한문 문장으로 현판에 새긴 글이다. 기문(記文)을 지은이는 이연수(李然秀)와 송일선(宋一善)이다.”, 「향교주사중건기(鄕校廚舍重建記)」에는 “요사채가 무너지자 유림(儒林)이 의연금을 갹출하여 수리하고, 1904년에 관천(觀川) 배석하(裵錫夏)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향교계안서(鄕校契案序)」에는 “마을 자치규약을 결성하고 향중의 인사들이 계를 만들어 윤리도덕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문건에 대하여 관천(觀川) 배석하(裵錫夏)가 1904년에 서문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