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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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山書堂 |
영어의미역 | Hwasan Village School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유학로 87[중리 11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태훈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9년 5월 29일 - 화산서당 문화재자료 제22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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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화산서당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서당 |
양식 | 익공 |
건립시기/연도 | 조선시대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2칸 반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유학로 87[중리 111] |
소유자 | 장인규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중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경우가 세운 서당.
[개설]
인동(仁同) 출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1581~1656]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태래(泰來)이다. 아버지는 장내범(張乃範)이며,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임진왜란 후인 1608년에는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학교의식』을 지어서 학교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구(鄭逑)가 반대파의 모해로 관직을 삭탈 당하자 경상도 내 유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2년(광해군 4) 어지러워져 가는 조야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1621년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 「청참이이첨소(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화산서당을 건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65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만회당집』이 있고, 사후 옥계사(玉溪祠)에 제향되었다.
[위치]
구미시 3공단과 접해 있다. 현재 이곳은 구미 공단과 연계되는 주거와 상업지구로 변모하여 옛 정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장곡 초등학교에서 북서쪽 약 200m 도로변에 위치한다.
[변천]
장경우가 만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51년(효종 2)에 성곡리 화산 아래 서당을 짓고 친히 화산서당이라 했다. 장경우는 사후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고 건물은 돌보는 이가 없어 퇴폐하였다. 1840년(헌종 6)에 사림에서 당기(堂基)를 봉두산 남쪽 기슭, 현 석적읍 중리로 옮기고 건물도 5칸으로 넓혀 중건했다. 원래는 강당 건물만 있었던 듯하며 현재의 문간채는 터를 옮겨 중건하면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44년 당 북쪽에 묘우를 세웠으나 흥선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강당 건물만 남게 되었다. 1989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2005년 사림에서 영남 대학교와 협약하여 2009년 11월에 영남 대학교 민속관으로 이전되었다.
[형태]
평평하고 넓은 대지에 방형으로 토석담을 두르고 대지 북편에 일자형의 강당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 강당 정면에는 맞배지붕의 일자형 3칸 문간채가 있고 좌측 담 복판에는 일각문이 나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꽤 큰 규모에 속한다. 진입은 정면의 문간채를 지나 건물 기단 정면 2개소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진입하는 정면 진입 구성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이고 방 전면으로 퇴칸을 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방 뒤로는 벽장을 두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벽장은 상하부로 구분되어 있고 하부에는 외짝여닫이, 상부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 측면으로는 쪽마루를 두어 툇마루와 연결되는 동선의 편의를 강구했다.
방 전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각각 두고 청방간에는 3분합 들어열개 맹장지문을 달아 공간 확장을 꽤했다. 분합문은 좌측방과 우측방이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좌측은 외들문과 2분합들문으로 구성된 반면 우측 3분합문은 설주를 세워 가운데를 여닫이문으로 처리하고 양쪽을 외들문으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대청 후면에는 머름를 들이고 각 칸에 쌍여닫이 바라지창을 설치했고 뒤로 쪽마루를 설치했다. 툇마루와 방 측면 쪽마루 사이에도 머름을 들여 외여닫이 당판창을 설치했다.
구조는 두 단의 견치석을 쌓은 기단 위에 듬직한 덤벙주초를 앉히고 전면열과 방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 구조를 받고 있다. 한편 기단 모서리에는 가는 장초석을 세워 추녀를 받치는 활주가 있어 육중한 지붕 구조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시각적으로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전면의 주상부는 행공과 익공을 주두와 결구해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익공은 아래, 위 모두 앙서형의 쇠서윗면에 연화를 조각하고 보머리에는 봉두를 조각해 끼웠다. 주간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연화를 초각한 화반을 각 1구씩 끼워 장식했다. 대들보 위는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부를 받고 있으며 종보 위는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부를 받아 전체적으로 5량가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대청 후면 주상부는 전면과 달리 화반을 놓지 않고 소로를 끼워 간략히 했다. 도리 간격은 전체를 3분으로 등분한 3분 변작법을 따르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조로(정면에서 바라본 처마선의 휨 정도) 폭이 큰 편이다. 모서리 서까래는 선자연 형태이다. 각 마루 끝에는 망와가 장식되어 있고 추녀 끝은 암키와로 막음하였다.
[현황]
2005년 사림에서 영남 대학교와 협약하여 2009년 11월에 영남 대학교 민속관으로 이전 하였고,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성곡2길 81-5[성곡리 418번지]에 화산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화산서당은 지방의 학교 건축으로 타 서당의 강당 건물과는 규모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 서당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로 판단되며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현재 이건이 추진 중에 있는 것은 차선책이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