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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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澤相 |
영어음역 | Jang Taeksang |
이칭/별칭 | 독립운동,정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동형 |
성격 |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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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
성별 | 남 |
생년 | 1893년 |
몰년 | 1969년 |
본관 | 인동 |
대표경력 |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국무총리 |
[정의]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치우(致雨), 호는 창랑(滄浪)이다. 장택상은 판서 장석룡(張錫龍)의 손자이며 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의 3남으로 1893년에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태[현 구미시 오태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경성의 한성소학교에서 신학문을 수업한 장택상은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경찰청장과 외무장관, 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5·16쿠데타 후에는 야당 지도자로 변신해 반(反)독재운동을 주도했다.
[활동사항]
일본과 중국, 러시아를 거쳐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수학한 장택상은 미국에서 이승만, 조병옥 등과 함께 구미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귀국 후에도 청구회 회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청구구락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미군정 하에서는 수도경찰청장과 경기도경찰부장을 지내면서 좌익세력 축출에 공을 세웠으며 혼란기의 치안 유지에 진력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2년에는 제3대 국무총리 직을 수행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도와 발췌 개헌안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장택상은 제2·3·4·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왕성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칠곡군에서 당선된 장택상은 제2대 국회에서 조봉암·김동성 등과 함께 공동 부의장에 선출됐다. 이어 탄핵재판소 의장에 피선되었고, 1950년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제3대 국회에서는 1956년에 원내(院內)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제4대 국회에서는 1958년에 반공투쟁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재일교포 북송반대 전국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9년에는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자 조봉암의 구명 운동을 펼쳤으며, 제5대 국회에서는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63년에는 자유당 총재가 되었고,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범국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66년에는 신한당 고문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9년 8월에 장택상이 사망하자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