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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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의미역 | 1919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 초순까지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칠곡 지역에서의 3·1운동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을 필두로 같은 해 4월 9일까지 약목·석적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이다.
[발단]
대구에서 만세 시위 준비가 진행 중이던 3월 7일에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내성(李乃成)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의 이상백(李相佰)을 찾아와 만세 시위를 모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경과]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의 만세 시위는 대구에서 찾아온 이영식과 이내성이 이상백과 이범성의 승낙을 얻고, 이어 임점석(林點錫)·이영래(李榮來)·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허도언(許道彦) 등 진평동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되었다. 3월 11일 이상백의 집에서 이상백·임용섭은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이영식·이영래·임점석 등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밤에 있을 만세 시위를 알리며 마을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오후 8시 30분 마을 뒷산에서 약 60명의 동민이 모인 가운데 밤이 깊도록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약 20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어서 밤 9시에도 약 30명이 만세를 고창하였다. 14일 오전 10시경 계성학교 학생 김도길(金道吉)이 들어와 동민 약 4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에서 권경보(權景甫)·권영해·김도길(金道吉)·김삼주(金三周)·김성윤(金性允)·박근술(朴根述)·박명언·박명출(朴命出)·박봉술(朴鳳述)·박삼봉(朴三鳳)·박순석(朴順石)·서기옥(徐琦玉)·서천수(徐千壽)·이내성·이상백·이영래·이윤약(李允若)·임동석(林東碩)·임삼선(林三先)·임용섭·임점석·장상건(張尙建)·장영직(張永稷)·장주서(張珠瑞)·장준현(張浚鉉) 등 25명이 체포, 기소되어 이상백 징역 2년, 이내성 1년 6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박봉술 1년, 박명언·권영해 10개월, 나머지는 각기 징역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북삼면(北三面) 숭오동(崇烏洞)[현 북삼읍 숭오리] 숭오교회 신자 안도수(安道洙)는 고농(雇農)으로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3월 11일에 숭오동 김익주(金益周) 집에서 약목면 복성교회 신자인 김익시(金益時)를 만나 양 교회가 힘을 합쳐 약목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김익시는 3월 12일에 복성동 최진화(崔塡和) 집에서 박상하(朴相夏)·배일언(裵日彦)·한종호(韓鐘浩) 등과 회합하여 3월 13일 약목 장날에 독립 만세를 고창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안도수 등 6명이 체포되었다. 안도수 징역 10월, 김익시 8월, 박상하·배일언·최진화·한종호 각기 5월의 징역형을 받고, 다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안도수·김익시 징역 6월, 나머지 4명은 무죄 방면되었다.
약목면(若木面) 평복동(平福洞)에서 지하수(池夏洙)·권성수(權星洙) 등 마을 청년 12명은 권영국(權寧國) 집에 모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여, 4월 9일 밤 9시경 마을 동산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검거된 5명은 5월 8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각기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았으나, 5월 30일 복심법원에서 태형 각 90대로 감형되었다. 피신한 지하수 등 6명도 체포되어 11월 27일에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았으나, 12월 13일 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석적면(石積面) 중리(中里)[현 석적읍 중리]에서는 장지희(張祉熙)·장영창(張永昌)·장도식(張道植) 등이 선산군(善山郡)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 22명을 규합하여 4월 8일 밤 9시경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21명 중 8명이 기소되었다. 이들은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장지희·장영창 징역 1년, 김득룡(金得龍)·장영남(張永南)·장영옥(張永鈺)·장영석(張永錫)·장영희(張永希) 징역 5월, 장두박은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6월 25일 복심법원에서 장지희·장영창은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장지희는 다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석적면 성곡리(城谷里)[현 석적읍 성곡리]의 장병규(張炳圭)·장준식(張俊植)·장영조(張永駣)·장재식(張在植) 등도 각처 시위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4월 9일 밤 8시와 10일 밤 8시 양일 간에 걸쳐 주민 박팔문(朴八文) 등 36명과 같이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중 21명이 체포되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장영조 징역 1년 2월, 박팔문 징역 4개월을 언도받고, 6월 17일 복심법원에서 장영조 징역 8월, 박팔문 태형 90대로 감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칠곡군의 3·1운동은 1920년대 이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청년운동·여성운동 등 민족 해방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