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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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同戰鬪 |
영어의미역 | Battle of In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칠곡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
[개설]
1592년 9월 20일부터 11월까지 칠곡군 인동 부근에서 일본군과 의병장 장사진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명나라 내부의 혼란과 일본의 국내 통일 과정상 상공업자의 성장 과정에서 토지 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삼포왜란(三浦倭亂),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일본의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이와 같은 문제를 정치적으로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 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을 치려고 구상하였다.
[목적]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街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육군 15만, 수군 9천여 명을 투입하여 약 7년간 조선을 유린하였다.
[발단]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방은 일본군의 주력부대의 통과 지점인 동시에 후방 보급로로서 계속 일본군이 주둔하여 적의 소굴이 되었다. 1592년 6월 말까지는 의병이 일어나지 못하였지만 대구의 의병 활동은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이 활동하였다. 인동 지역은 편제상 대구진에 소속되었지만 실제 의병의 연계는 안동, 예안, 의성, 군위, 비안 등의 지역과 밀접한 면을 보였다. 9월에 접어들자 경상북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경주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퇴각 하는 등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경과]
군위현의 교생(校生) 장사진(張士珍)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일본군의 대구부에 본진을 두고 있던 기노시타 시게카타[木下重賢]의 850명과 난조 모토키요[南條元淸]의 군사 1,500명이 인동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서 군위(軍威) 경계까지 침범하여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장사진은 의병을 이끌고 출격하여 왜적을 격멸하였다. 동생인 장원규(張元珪)도 가담하였는데, 어느 날 급히 출동하여 적을 치고 추격하던 중에 유탄으로 중상을 입어 전사하였다. 장사진은 이에 더욱 분격하여 싸울 때마다 승리하였는데, 9월 20일에 수백 명의 적이 본진으로 쳐 들어오자 수십 기의 정병을 거느린 채 곧 역습을 단행하여 적장을 베었다.
[결과]
제1차 전투 승리 후 2차로 9월 30일에 왜군은 더욱 많은 병력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일본군은 장사진을 유도하기 위해 복병을 만들었는데, 적과의 전투 과정에서 적의 포위에 빠져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의 사상도 많았다. 이후 왜군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전념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칠곡군의 전투 상황과 의병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