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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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의 조선시대 역사.
[개설]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의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1만여 병으로 팔거산성에 머무르며 진영을 설치하면서 “진영을 설치하여 승리할 수 있는 곳으로서는 천하에서 최고이다”라고 할 정도로 칠곡은 임진왜란 등의 전란기에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그러한 역할 때문에 도호부가 되었다.
[행정구역의 변천]
지금의 칠곡군은 조선시대 칠곡도호부와 인동도호부가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인동이란 지명은 고려 초에 신라의 수동현을 인동현(仁同縣)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지역으로 줄곧 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파견되고 약목현(葯木縣)을 병합했다. 조선조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현감이 파견되었다.
칠곡도호부는 고려시대 팔거현(八渠縣)으로, 1018년(현종 9) 경산부의 속읍이 된 뒤 조선조까지도 계속 속읍으로 존재하였다. 1593년(선조 26) 경에 경상좌우도가 합치된 후 경상도 감영을 3년간 팔거현으로 옮겨 설치하면서 이 지역이 중요시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도원수 한준겸의 요청에 의해 천생산성이 축조되면서 인동현이 인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07년(선조 40) 선산부 해평현이 인동부에 내속하였다가 1608년(광해 1)에 환속하였다.
1640년(인조 18) 가산산성이 수축되면서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되고, 읍치를 산성 내에 두고 군위, 의흥, 신녕, 하양의 4 현을 관장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 후 17~18세기에 걸쳐 축조된 가산산성은 천험의 요새에 입보 시설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산성으로는 유일하게 정상에 내성(內城), 중턱에 중성(中城), 하단에 외성(外城)을 쌓은 3중성(三重城)이며 포곡식(包谷式)[테뫼식] 석성(石城)이다. 1644년(인조 18)에 인동부의 소호리와 복곡리가 칠곡부로 편입되었다. 1819년(순조 19) 칠곡부의 읍치를 팔거 옛터[지금의 대구 북구 읍내 칠곡초등학교]로 옮기고 산성에는 별장을 머물게 하였다. 이처럼 칠곡부의 읍치가 지금 대구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칠곡 없는 칠곡’이 남은 셈이다.
[재지 세력의 동향]
17세기 치열했던 남북 및 남인과 서인 사이의 당쟁의 와중에서 영남학파의 기수로 활약한 광주이씨 칠곡파 이원정 가문은 갑자사화를 계기로 이지(李摯) 대에 팔거현 상지촌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영천인 최하(崔河)의 무남독녀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영남 지역에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선산 지방의 명문인 신천강씨와 선산김씨, 성주 지방의 벽진이씨, 대구 지방의 인천채씨 등과 혼인하면서 칠곡 지역 매원 석전리로 확산되어 가면서 상지·매원·석전동을 중심으로 강인한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가지면서 칠곡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군림하였다.
이윤우-이도장-이원정-이담명으로 이어진 광주이씨 칠곡파는 16세기 이래 강력한 재지 기반을 구축한 데다가 퇴계·남명학통을 겸수한 한강 학통을 전수하면서 17세기 후반 남·서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영남’과 ‘경남(京南)’의 제휴 과정에서 영남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담명이 쓴 『농사일록』을 통해 왜·호란을 겪은 뒤 재지 사족들이 황무지 개간과 전민 경영, 오지·벽지 개발과 낙동강 어염 선박을 이용, 상행위를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그 사회경제적 기반의 구축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이후 노론일당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실세한 남인들은 순조 즉위년 정조 독살설이 영남에 유포되자 장시경 모반 밀계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인동의 장시경 형제가 서울로 진격, 노론 벽파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역모 고변으로 인해 일어난 인동작변(仁同作變) 사건으로 인해 인동 장씨 일문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