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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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謙齋集 |
영어공식명칭 | Gyeomjaejip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혁진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을 소재로 지은 한시가 수록된 조태억의 문집.
[개설]
『겸재집(謙齋集)』은 조선 후기의 문신 조태억(趙泰億)[1675~1728]이 남긴 시문집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 및 간행의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역을 소재로 한 한시가 열 편 실려 있다. 45권 10책의 필사본이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조태억은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가 되고, 1708년 이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1710년 대사성에 오르고, 통신사로 차출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사촌형 조태구(趙泰耉)와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영조가 즉위하자, 병조판서가 된 지 8일 만에 삼정승 중에 결원이 생겨 이조판서 이조(李肇)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 날 호위대장(扈衛大將)을 제수받았으며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725년(영조 1) 사간 이봉익(李鳳翼), 지평 유복명(柳復明) 등의 청으로 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이어 쫓겨나기도 하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새나 짐승을 잘 그렸다. 저서로 시문집인 『겸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편찬/간행 경위]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 및 간행의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709년 7월에 철원부사가 되었으니, 이때 철원과 관련된 시를 지은 시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서지]
45권 10책의 필사본으로, 10행 20자에 책 크기는 26×18㎝이다.
[구성/내용]
1709년 7월에 철원부사가 된 조태억은 철원과 관련된 시를 다수 지었다. “동주(東州)가 있는 변경은 멀다. 나의 시 한 자도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서, 그가 돌아갈 때 등불 아래서 붓 가는 대로 시 열 편을 지어서 준다[東州邊是遠, 以不得余一字詩爲恨, 於其㱕, 燈下信筆, 題贈十絶].”라는 글 아래 열 편의 오언절구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삼부락(三釜落)」, 「고석정(孤石亭)」, 「보개산(寶盖山)」, 「도덕탄(道德灘)」, 「북관정(北寬亭)」, 「궁왕허(弓王墟)」, 「천양각송계대(穿楊閣松桂㙜)」, 「군자정지(君子亭池)」, 「술회(述懷)」, 「제증(題贈)」 등이다. 시 속에는 금학산(金鶴山)이 등장하기도 하고 정자연(亭子淵)과 화강(花江)이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여, 한탄강 주변에 있는 명승들이 묘사되어 있다.열 편 중 대표적인 작품 두 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금유유한(到今有遺恨)[지금에도 남는 한 있으니]
미등보개산(未登寶盖山)[보개산을 오르지 못한 것]
산령응소아(山靈應笑我)[산신령이 나를 비웃을 터]
분주로기간(奔走路歧間)[갈림길에서 분주한 것을]
「도덕탄(道德灘)」
도수인무음(盜水人無飮)[도둑의 물이라 마시는 사람 없으나]
탄신능불괴(灘神能不愧)[여울의 신 부끄러워하지 않네]
전애게선명(鐫崖揭善名)[벼랑에 좋은 이름 새겨 걸어 놓으니]
이가지오의(爾可知吾意)[너는 나의 뜻을 알리라]
[의의와 평가]
조태억이 조정에 나아가 다채로운 활약을 펼쳤듯 문집도 방대한 양의 다양한 글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철원부사 시절에 쓴 시 열 편을 통하여 18세기 초 철원 지역 명승들의 풍광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