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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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象秀 |
영어음역 | Yi Sangs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석린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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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증/추서 | 제학(提學) |
생년 | 1820년 |
몰년 | 1882년 |
본관 | 전주(全州) |
자 | 여인(汝人) |
호 | 어당(峿堂) |
출신지 | 회인(懷仁) |
아버지 | 이연주(李演周) |
시호 | 문간(文簡) |
[정의]
조선후기의 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여인(汝人), 호는 어당(峿堂)이다. 이연주(李演周)의 아들로,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다.
[생애]
1820년(순조 20) 회인(懷仁)에서 출생하였는데, 1871년(고종 8) 청주 강외면 연제리에 이사하여 1882년에 우거지(寓居地) 연제리에서 죽었다.
[활동사항]
1855년(철종 6)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 되었고, 임술민란 뒤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를 올렸다. 1880년 고종(高宗)이 문학과 재능이 있는 인물을 천거하도록 명하자, 천거를 바라고 청탁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때 그는 문학에 능하고 서울의 노론 고관들을 많이 알고 있어 김낙현(金洛鉉) 등과 함께 경연관 겸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았다.
다시 시강원진선과 사헌부집의 등을 제수 받았으나 사직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상소와 실학(實學)과 실사(實事)에 힘쓸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으나, 당시 청나라에 있던 대원군의 환국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이 있었던 것 같다.
[학문과 사상]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잇는 호론(湖論)에 속하였다. 동문으로 민상호(閔象鎬)·성기운(成岐運)·서응순(徐應淳) 등이 있고, 임헌회(任憲晦)와도 교우하였으며, 또한 윤정현(尹定鉉)·신헌(申櫶)과 같은 노론 인사들과도 친숙하였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병약하였으나 15세 때 상경하여 수학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구방심(求放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고, 제갈량(諸葛亮)과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였으며, 회인과 공주에 거주하며 박문호(朴文鎬)와 같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학문에 있어 먼저 문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갱신고(更辛苦)·순승법(循繩法)과 같은 독특한 교수법을 창안하였다
[저술]
저서로는『어당집(峿堂集)』24권, 『어당속집(峿堂續集)』8권, 『남명사정강(南明史正綱)』33권, 『몽유(蒙牖)』1권 등이 있고 가사 작품으로는 「금강별곡(金剛別曲)」, 「경화장관(京華壯觀)」 등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추양사(秋陽祠)에 배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