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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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복수 |
[정의]
지난해 가을에 심은 보리가 수확되기 전 궁핍한 시기의 경상북도 청도 농민의 생활상.
[개설]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보릿고개’는 한 해 지은 곡식이 떨어지고 햇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가 심한 곤궁함을 겪는 시기를 일컫는 것으로, 감나무가 많은 청도군에서는 매년 5월 ‘감꽃이 필 때’가 보리가 익기 전이어서 이때를 보릿고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부른다.
[구황 음식]
대부분의 지역은 보릿고개가 닥치면 구황 음식으로 다양한 곡물과 식물들을 활용하여 밥을 대신하였다. 이는 청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납작 콩[콩기름을 뺀 콩]을 미량의 쌀과 보리에 섞어 밥을 해 먹었다. 이 밖에 산나물 죽, 갱죽, 쑥과 밀가루로 만든 쑥버무리, 소나무 껍질로 지은 송기 밥으로 연명하였고, 밥을 대신하여 술지게미, 비지 등 못 먹는 것이 없었다. 또한 풀대 죽을 끓어 먹고 얼굴색은 누렇고 배만 불러서 5월이면 마을에서 기형적인 사람들이 골목마다 많이 보였다고 전한다. 그나마 겨울 결빙기를 지나 초봄 해빙기가 되면 돋아난 쑥을 활용한 쑥버무리를 먹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청도군의 80대 이상 초로들은 이른 아침 골목에서 지천에 깔린 감꽃을 먼저 주워 먹기 위해 새벽잠을 설친 이야기를 전한다. 다른 지역과 달리 감나무가 많았던 청도 지역에서는 4∼5월에 피는 감꽃이 당시 아이들의 구황 음식으로 이용된 것이다.
1950년대 6·25 전쟁 이후에도 구황 음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납작 보리쌀을 먹거나 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로 국수,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며 보릿고개를 버티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자급자족의 정부 시책으로 통일 벼의 생산량을 증가시켜 벼농사에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고, 1970년대 이후로 청도에서는 더 이상 보릿고개를 지내기 위한 구황 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