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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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廷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박정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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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박정찬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2일 - 박정찬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5일 - 박정찬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 기각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25일 - 박정찬 징역 4개월 선고 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4월 27일 - 박정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박정찬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
출생지 | 박정찬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
활동지 | 박정찬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정찬은 1867년(고종 4)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大川里)에서 출생하여 1922년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전개된 운문면 만세 운동은 문명 학교(文明學校) 졸업생 및 교사들이 주동하였다. 당시 문명 학교 졸업생 김상구(金相久)와 김종태(金鍾台)는 3월 1일 광무 황제(光武皇帝)의 국장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3월 10일 김종태의 집에서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운동을 보고하고, 운문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15일 밤 김재화(金在華)와 손기현(孫琪鉉)은 박창기(朴昌淇)의 집에서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일원의 마을마다 부착하였다.
3월 17일 밤 손한조(孫漢祚)를 비롯하여 김진효(金鎭孝)·김상구·손기현·홍해성(洪海性) 등은 문명 학교에 모여 만세 운동을 촉구하는 등 만세 운동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3월 15일 밤에 김재화와 손기현 등이 격문을 만들어 부착한 사건과 관련하여, 김진효·김종태·김상구·강재식(姜在植)·김종식(金鍾軾)·홍용팔(洪龍八)·홍해성·김대선(金大善) 등이 운문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운문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행한 동료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운문면사무소로 이동하여 각자 1자씩 ‘대한 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라 쓰고, 여기에 ‘독립회(獨立會)’라 씀으로써 ‘대한 독립 만세’ 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진효의 개회와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고 운문면 각 동리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운문면 대천동의 박정찬(朴廷瓚)[1867∼1922]과 박재영 등도 김진효 등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19일 운문면 만세 운동의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청도 경찰서 일본인 순사 및 조선인 순사보 5인이 신원리로 출동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동민들에게 구타당하고 퇴각하였다. 이어 3월 20일 대구 헌병 분대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박정찬도 체포되었다.
박정찬은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4개월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대구 복심 법원과 1919년 9월 25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