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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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珀谷里寺址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산8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태호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2년 12월∼1993년 12월 - 박곡리 절터 경북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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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박곡리 절터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산81 |
성격 | 사지|절터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절터.
[개설]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절터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오갑사(五岬寺)의 하나인 소작갑사(小鵲岬寺) 절터의 한 곳으로 추정되는 절터이다. 지금은 과수원과 버섯 재배지로 활용되며, 불상 유적과 기와 파편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존속했던 사찰의 터이다.
[변천]
소작갑사지에 대한 존재와 위치를 기록한 고문헌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양(寶壤) 이목(梨木)조와 청도동 호거산 운문사 사적(淸道東 虎踞山 雲門寺 事蹟)[1718(강희 57)]이 있다. 고문헌에 의하면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한 신승(神僧)이 운문산에 들어와 지금의 금수동(金水洞) 북대암(北臺庵) 터에 초암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놀라 우는 소리를 듣고 그 곳이 오령(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중심부에 대작갑사(大鵲岬寺)[지금의 雲門寺],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소작갑사,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는데, 역사가 다 끝난 시기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이 때 소작갑사가 창건되었다. 그 후 후삼국에 들어와서 오갑사가 없어질 때, 소작갑사도 같이 없어졌다.
[위치]
청도읍에서 58호선 국도를 따라 경주 방면으로 약 20㎞ 떨어진 금천면사무소에서 선암로를 따라 1㎞ 정도 가면 운강 고택이 나온다. 운강 고택에서 박곡로를 따라 대비사 방향으로 2.5㎞ 가면 박곡 새마을 회관이 나온다. 박곡 새마을 회관에서 골안못 방향으로 1.2㎞ 가면 골안못이 나온다. 골안못에서 임당리 베틀 바위 방향으로 약 200m 정도 가면 청도군에서 세운 소작갑사 유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이 절터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청도군은 1992년도의 문화 사업으로 가슬갑사지를 찾아 신라 화랑정신을 재조명하고 사적으로 가꾸어 민족과 조국의 번영을 도모하는 훈련 도장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이러한 문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북 대학교 박물관과 청도군은 1992년 12월 3일 학술 용역을 체결하고 가슬갑사지 위치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갑사의 하나인 소작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현재 대비사, 박곡리 미륵당 부근, 오봉리 사지, 베틀 바위 부근 사지를 조사했는데, 베틀 바위 부근 절터가 박곡리 절터이다.
발굴 결과 건물지의 범위는 동서 16m, 남북 11m로 2회 이상 건물을 개축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후대 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불대좌(佛臺坐)의 기초석은 중앙 칸의 뒤쪽에 치우쳐 있다. 후대 건물지의 초석은 직경 1m 미만의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적심(積心)은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현재 확인된 초석은 정면 열의 초석과 서쪽 측면 열의 초석만 남아 있다. 건물의 형태로 보아 중앙 칸의 2, 3기둥이 없는 건물 구조로 추정된다. 불대좌의 지대석은 다듬은 장대석 2매를 남북에 두고 동서는 보다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ㅁ’형으로 결구하였다. 불대좌의 지대석 중앙에는 사리함을 매장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깊이 50㎝의 방형(方形) 토광이 있다. 주변에서 백자·막새·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지대석 아래에는 통일 신라 때의 기와 조각이 깔려 있다. 이 불대좌의 지대석은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나 통일 신라 시기 또는 그 이전 시기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 주변에는 곱게 치석한 신방석과 불대좌 상대 석편(上臺 石片)이 흩어져 있고, 남쪽 밭의 벼랑에는 상반신이 없어진 좌불(座佛)이 방치되어 있다.
발굴 결과 수습된 석재로는 좌불 조각, 불대좌 상대석(上臺石), 신방석(信枋石), 원형의 주초돌 등이다. 채집 유물은 당초문 암막새, 화엽(花葉) 당초문 암막새, 중판 이하의 타날 기법으로 제작된 평기와, 토수 기와, 두께 5㎝ 정도의 청회색의 경질 무문전(硬質無文塼) 조각들이다. 자기 종류는 백자 대접, 백자 조각이 나왔다.
[현황]
절터는 베틀 바위의 북동쪽의 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비교적 급한 사면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과수원과 버섯 재배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면적은 1,652.89㎡[약 500여 평]로 경작지 일대에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흔적과 불대좌의 지대석이 남아 있다. 절터에는 석조 대좌와 목이 없어지고 반파된 석불 좌상이 있으며,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 조각들이 수습된다. 석조 대좌와 석불상 사이는 50m 이상 떨어져 있고, 기와 조각이 넓은 지역에 걸쳐 산재하고 있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군에서 세운 소작갑사의 유적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현재 억산 아래 박곡지 상류에 있는 대비사의 전신이 바로 이 절이라고 전해오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