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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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俊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63년 3월 6일 - 박준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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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일 - 박준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1일 - 박준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박준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박준규 출생지 - 충북 청원군 오창면 성재리 87번지 |
활동지 | 천안 아우내 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 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준규(朴俊圭)[1863~1919]는 1863년 3월 6일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재리 8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순국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4월 1일 갈전면[지금의 병천면(竝川面)] 아우내 장터에서는 약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오후 1시경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주모자 중의 한 명인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박유복을 비롯한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서 열을 지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때 헌병들은 총기를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사상자가 수십 명 발생했다. 박준규는 천안 사람은 아니지만, 아우내 장터가 천안 뿐 아니라 충청북도 사람까지 포괄하는 큰 장이었기에 장에 나왔다가 함께 시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오후 4시경 약 40명이 주재소에 몰려가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헌병에게 큰소리를 내고, 주전자를 집어 던지고, 유치장 벽에 발길질을 하였다. 군중들은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고 탄약갑을 잡아당기면서 격투를 벌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의 야만적인 발포가 또다시 있었고, 이로 인해 박유복이 사망하였다. 이날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적어도 30명 이상이 발생했다.
[상훈과 추모]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