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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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公轍 |
이칭/별칭 | 원평(元平),사영(思穎),금릉(金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남공철(南公轍)[1760~1840]은 조선 후기 정조와 순조, 헌종 등 3대에 걸쳐 왕을 보좌한 학자 겸 정치가, 문장가이다. 1778년(정조 2) 정조가 아버지 남유용의 시문을 모아 간행할 때, 남공철이 직접 왕명을 받아 이를 수행하였다. 1824년에 목천이 승지(勝地)이고 선비들이 많아 후진을 양성할 만한 곳으로 인식하여 동헌 가까운 곳에 산장을 마련하고 노후를 보내게 되어 천안과 인연을 맺었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또는 금릉(金陵)이다. 아버지는 대제학(大提學)과 이조 판서를 지낸 남유용(南有容)이다.
[활동 사항]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였고,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기에 1784년에 음보로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제수받았다.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역임했다. 친시 문과에 급제했을 때, 정조는 친히 남공철을 불러서 아버지 남유용을 회고하며 감격스러움을 표할 정도로 아꼈다. 특히 정조는 남공철을 낭청에 배속해 사관직을 겸하도록 배려하였다. 급제 이후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는 등 정조의 우문 정치(右文政治) 추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으며, 친구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 문학풍을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 반정 운동에 참여하였다. 문체 반정 운동에 참여한 이후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하는 데 앞장섰다.
정조와 순조의 재위 기간 동안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정조가 죽자 비문을 지었다. 순조 즉위 뒤 동지실록사(同知實錄事)로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아홉 번에 걸쳐 이조 판서를 제수받았고, 아버지 남유용에 이어 대제학을 역임하는 영예를 누렸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 재상을 역임하였다. 1833년에 나이가 들어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남공철은 목천에 선비가 많다고 판단하여 목천을 낙향처로 정하였다. 목천 도동 서원장으로서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840년(헌종 6)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송나라 때 문인인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고,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순조·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시문집으로 『귀은당집(歸恩堂集)』·『금릉집』·『영옹속고(穎翁續藁)』·『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영은 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묘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4-2번지에 있으며, 성남시 향토 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