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18 |
---|---|
한자 | 康復誠 |
이칭/별칭 | 명지(明之),죽간(竹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창열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군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이다. 시강원 문학을 지낸 강중진(康仲珍)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강유선(康惟善)이다.
[활동 사항]
강복성[1550~1634]은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직장(直長)·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 현감이 되었다가 곧 김제 군수로 옮겼는데, 김제 군수로 있으면서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1599년(선조 32) 고양 군수를 거쳐 천안 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가르친 인연이 있다 하여 품계를 올려 주었으며,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평산 부사·전주 부윤·청송 부사 등의 외직을 거친 뒤 1617년(광해군 9)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이 제수되었다.
이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 군수에 제수되었으며, 곧 성주 목사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한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고, 곧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여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연로하여 벼슬을 사직한 뒤 향리인 선산으로 귀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죽간집(竹磵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일찍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을 받았으며, 천안 군수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