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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00
한자 洪良浩
이칭/별칭 한사(漢師),이계(耳溪),문헌(文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24년연표보기 - 홍양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52년 - 홍양호 정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77년 - 홍양호 경흥 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94년 - 홍양호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99년 - 홍양호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01년 - 홍양호 판중추부사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홍양호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홍양호 묘 천안시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
묘소|단소 홍양호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일봉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
대표 관직 대제학|판중추부사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묘소를 두고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조선 시대 영조 때 실학파의 거두이며 대학자이다. 박학한 문장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고 그 이름을 떨쳤다.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초명은 양한(良漢)이었으며, 자는 한사(漢師)이고, 호는 이계(耳谿),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할아버지는 단양 군수를 지낸 홍중성(洪重聖), 아버지는 홍진보(洪鎭輔)이고 어머니는 심수현(沈壽賢)의 딸이다. 이조 판서를 지낸 홍경모(洪敬謨)가 손자이다.

[활동 사항]

홍양호는 1747년(영조 23) 진사를 거쳐 1752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수찬·교리 등을 거쳤고,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산림녹화에 주력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의뢰하여 벚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서울의 우이동(牛耳洞)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 정치가 심해지자 경흥(慶興) 부사로 나갔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 한성부 윤(漢城判尹)·대사간을 지내고, 178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뒤 1794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 판서가 되었고, 1799년 양관(兩館)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두 차례에 걸쳐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여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고증학(考證學)을 수용·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글씨는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곡산의 신덕 왕후 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루 상량문(北門樓上梁文)이 대표적이다.

[학문과 저술]

홍양호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기효람(紀曉嵐) 등의 학자와 교유하고 귀국한 후에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계집』 37권 외에 『육서 경위(六書經緯)』·『군서발배(群書發排)』·『격물해(格物解)』·『칠정변(七情辨)』·『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고려 대사기(高麗大事記)』·『흥왕조승(興王肇乘)』·『삭방습유(朔方拾遺)』·『북새기략(北塞記略)』·『만물원시(萬物原始)』·『향약절중(鄕約折中)』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묘소]

부인인 동래 정씨(東萊鄭氏)와 합장하여 묻혔다. 합장 묘비는 1832년(순조 32)에 세운 것으로 아들 홍의준(洪義俊)이 짓고, 손자 홍경모(洪敬謨)가 글씨를 쓴 것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일봉동 일봉산 8부 능선에 있다. 묘소에는 묘비·상석·장명등 석수 각 1기가 있으며, 묘역은 33㎡ 정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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