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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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光岳宣武功臣敎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삼방로 9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작성 시기/일시 | 1604년 -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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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급 시기/일시 | 1604년 -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발급 |
수급 시기/일시 | 1604년 -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수급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6월 16일 -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보물 제95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광악 선무공신교서 보물 재지정 |
소장처 | 독립 기념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 |
성격 | 고문서|교서 |
관련 인물 | 이광악 |
용도 | 선무공신 책봉 교서 |
발급자 | 선조 |
수급자 | 이광악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이광악을 선무공신 3등에 봉하는 공신 교서.
[개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이들을 공적별로 분류하여 공신(功臣) 책봉을 하였는데, 이때 전장에서 왜적을 치거나 군사와 군량미를 주청(奏請)했던 이들을 선무공신에 봉하였다. 이광악(李光岳)[1557~1608]은 선무공신 3등으로 녹훈되어 이 교서를 받았다.
[제작 발급 경위]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을 선무공신으로 책봉했는데, 왜적을 친 장수들과 명나라에 군사와 양곡을 주청한 사신들을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다. 당시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이 1등, 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가 2등, 그리고 이광악 외 9인이 3등으로 책훈(策勳)되었다.
선무공신 3등에 대해서는 공신 교서와 함께 초상이 내려졌고, 관작과 품계가 한 자급씩 올랐다. 또한 부모와 처자 또한 한 자급씩 올리되 아들이 없으면 조카와 사위가 이어받도록 하였으며, 반당(伴倘) 4명·노비(奴婢) 7명·구사(丘史) 2명·논밭 60결·은자 5냥·내구마(內廏馬) 1필이 하사되었다.
[형태]
교서는 원래 한 장의 두루마리 형태였으나, 후대에 후손이 잘라서 앞뒤를 명주 표지로 첩장(帖裝)하였다. 크기는 가로 22.3㎝에 세로 41㎝이고, 교서지 문면의 크기는 가로 22.3㎝에 세로 34㎝이다. 총 10면이며 한 면에 7행씩 총 62행이 해서체로 필사되어 있으며, 연월일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구성/내용]
이광악 선무공신교서는 다섯 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광악의 관작과 품계를 서술하고 임진왜란 중 진주성 방어의 무공이 밝혀져 있다. 둘째, 공신의 특전으로 이광악에게 내려지는 특전과 상사에 관한 내용이다. 셋째, 태상사(太常寺)에서 공적을 기록하고 철권을 내리니, 충정을 독실하게 하여 총명(寵命)을 보전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넷째, 선무공신 18명의 명단이다. 이광악은 3등 다섯 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공신 교서 발급 연월일과 시명지보가 찍혀 있다.
[의의와 평가]
선무공신 교서 중 현존하는 것은 이광악 외에 이순신, 이운룡, 원균에게 내려진 것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중 진주 대첩의 상황과 공신에 대한 포상 정도를 살피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며, 공신 교서의 형식을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광악 개인의 전기 자료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1988년 6월 16일 보물 제95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