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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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稷山俱樂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 있었던 청년 단체.
[설립 목적]
직산 청년회는 지(智)·덕(德)·체(體)의 육성을 취지로 1개월에 1회씩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한 지식 계발과 풍속 개선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20년 5월 22일자 『동아 일보』의 기사를 보면, 천안군 직산 공립 보통학교에서 1920년 5월 15일 오후 8시에 천안군 민재기(閔載祺)의 주최로 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청년(靑年)의 광(光)’이란 주제로 천안 호서 은행 성원경(成元慶)이 강연하였다. 이 강연이 끝난 후 직산 청년 구락부의 발회식이 이어졌으며, 천안 구락부 간부 이헌구(李憲求)의 축사가 있었다. 방청인이 400명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으며, 밤 11시 30분에 폐회하였다. 그리고 1920년 6월 15일자 『동아 일보』 기사에 직산 지역의 유지 여러 명의 발의로 1920년 6월 6일에 직산 공립 보통학교에서 ‘직산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 취지는 지육[智育]·덕육[德育]·체육[體育]의 3개 주요 덕목을 정하고, 1개월에 1회씩 지식 계발과 풍속 개선을 위해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회원은 이미 83명에 이르며, 당일 회에 모인 사람은 300명에 달한다고 기록하였다.
직산 청년회는 회장 민재기, 총무 임정준(任正準), 체육부장 정우석(鄭禹錫), 덕육부장 강석희(姜錫熙), 지육부장 김상철(金相喆), 간사 민계동(閔啓東)·송명한(宋明漢)·이영주(李榮周)·최용환(崔龍煥)·유병엽(柳柄葉)·이용묵(李容黙)·김동한(金東翰)·이병선(李炳璿)·남기철(南基撤), 회계 민재길(閔載吉)이었다. 회원 수는 83명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천안 향토 연구자[동성 중학교 황서규]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직산에서의 만세 운동이 확인된다. 1920년 5월 직산 청년 구락부 회원들은 모(某) 서당에서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하고 군서리 오수영(吳壽泳)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5월 15일 신주선(申柱仙), 유병엽, 오수영(吳壽泳), 임직준(任直準), 오창영(吳昌泳)·민재식·송중영(宋重榮) 등은 직산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직산 청년 구락부 회원들과 강연회에 참여한 마을 주민 400여 명은 직산 공립 보통학교를 빠져 나와 미리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우체국을 습격하였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양조장을 습격하는 등 장터를 누비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신주선, 유병엽, 오수영, 임직준 등은 태형 60대를 받았고, 오창영, 민재식, 송중영 등은 체포되었으나 훈방 조치를 받고 풀려났다.
직산 청년 구락부 회원들은 사건이 있은 후 성환 장날에 재차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태형으로 건강이 악화된 회원을 제외하고 송중영, 김태일(金兌日), 김웅각(金雄珏) 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만세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청년층은 민족 독립운동의 중요 세력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 운동 이후 운동 조직이 탄생하면서 민족 운동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의 한 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직산 구락부 역시 지역 청년의 지·덕·체 육성과 지식 계발과 풍속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자신들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며, 운동의 폭을 확대시켜 나갔고, 대중과의 연계를 통해 항일 의식의 확산에 앞장섰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