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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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아우내 場터 萬歲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충청남도 천안군의 아우내 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천안 출신의 유관순(柳寬順)은 3·1 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유중권(柳重權), 숙부인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장의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경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伯夏)·김상철(金相喆) 등의 20대 청년들을 비롯한 조인원(趙仁元)·조병호(趙炳鎬)·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 다양한 마을에서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운동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갈전면[지금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3단계로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1시 무렵 시작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세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큰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오는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헌병과 수비대가 급히 출동하여 총을 쏘고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 경에 일어났다. 사망자의 시체를 주재소로 옮기면서 항의하는 군중을 향하여 일본 헌병은 총을 쏘는 것으로 응대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군중이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결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가 부상이나 투옥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날 체포된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법정 투쟁을 벌이며 재판 결과에 항고하였다. 그리고 조인원(趙仁元)·유관순·유중무 각 3년 형, 김용이·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상훈·백정운(白正云)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박제석 각 8개월 형, 박봉래 기각, 신씨(申氏) 무죄,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각 2년 형, 김상철 6개월 형 등의 판결을 언도받았고,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한 끝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오늘날까지도 천안 시민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에 전 국민이 성금을 모아 1987년 천안시 목천읍에 세운 독립 기념관을 비롯하여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아우내 3·1 운동 독립 사적지 등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주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쳐 싸웠던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