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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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中央鑛業所 |
이칭/별칭 | 직산 광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있었던 일본인 광업 회사.
[개설]
조선 중앙 광업소는 통칭 직산 광산으로 불렸으며, 입장면 양대리에 있었다. 금 산출량이 많아, ‘노다지’라는 말을 만들어낸 평안남도의 운산 광산 다음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광업소였다.
[설립 목적]
대한제국과 일본인 민간인 사이에 ‘직산군 금광 합동 조약’이 체결된 이후 직산 지역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00년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인 사이에 직산군 금광 합동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조선 중앙 광업소가 설립되었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채굴권을 미국인에게 양도하였다.
[주요 사업과 현황]
조선 중앙 광업소는 직산 광산에서 막대한 양의 광석을 채굴하였다. 직산 광산의 채굴량은 충청도 채굴량의 1/2에 달할 정도였다. 조선 중앙 광업소는 그 성쇠에 따라 인부의 증감이 있었으나, 대체로 2,000명 이상이 근무하엿다. 가장 번창했을 때는 양대리에 광부와 상인이 많이 살았으며, 세대 수는 500여 세대에 인구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직산금광은 당시 금만 파먹어도 살 수 있는 곳이라 할 만큼 금 채굴이 많았던 지역이다. 하지만 산출된 금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정련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들은 일본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금덩이를 입에 넣거나 귀에 끼우거나 혹은 삼키기도 하면서 금의 유출을 막으려 했으나 일본인에게 발각되어 변상뿐만 아니라 죽도록 매를 맞고 쫓겨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