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A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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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정지 |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소사역에서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해갔지.”
일본으로 수출하는 미곡에 대한 검사의 필요성은 이미 1910년 이전부터 제기되어 1909년 목포상업회의소가 독자적으로 수출현미에 대해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어 총독부도 미곡검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1913년 6월 각 도장관에게 통첩하여 지방행정기관의 감독 하에 상업회의소 또는 곡물동업조합이 수출미곡에 대해 검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부산, 진남포의 3개 상업회의소와 평택, 대구, 김천, 왜관, 경산, 청도의 곡물동업조합이 현미검사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총독부의 미곡검사는 대일 미곡수출의 확대와 더불어 계속 강화되었다. 그러나 검사가 통일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검사가 끝난 미곡에 대해 부정행위가 이루어지거나 수송 도중 미곡이 손상되는 일이 발생되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시장에서 조선미곡의 상품 가치가 떨어지자 조선총독부는 1932년 10월부터 국영검사를 실시하였다.
부천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최초의 동맥으로 1899년에 부설한 경인선의 소사역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약탈적 성장 구조 내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부천평야 등을 비롯하여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이 소사역에서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해갔는데, 그 수집·보관을 주관했던 곳이 ‘반전농림합명회사’였다.
이 회사는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다가 김옥균의 자객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친일파로 변신, 이완용 내각에서 고위관직을 역임하고 일진회를 만들어 한일합방을 주장했던 송병준의 것이었다. 당시 그의 농장은 현재 부천시 신도시 일대를 거의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수탈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반영하듯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던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 미곡검사소 소사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사역은 광활한 김포평야를 배경으로 해 이곳의 농산물들을 집적하고 다시 인천항을 통해 수출하기 위한 의도로 설치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 촌락과 민가가 드문 이곳에 역을 만들었던 것은 이 지역 일대의 미곡 등 각종 농산물을 수탈해 가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한편 소사역 건립과 함께 부천의 도시적 성장을 가져온 경인국도는 부천의 출입구이자 관문으로서 경인선 전철 역곡역, 소사역, 부천역, 중동 남부역과 접해 있으며, 유한대학, 가톨릭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부천대학도 근접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