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7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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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一韓 |
영어공식명칭 | Yu Ilhan |
이칭/별칭 | 천여(天汝)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1월 15일 - 유일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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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9년 6월 - 유일한 미국 한인소년병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유일한 네브래스카고등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유일한 미시간주립대학교 상과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51년 - 유일한 남가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유일한 고려공과기술학교[경기도 부천]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유일한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 유일한 유한공웝고등학교 건립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유일한 연세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 유일한 동탑산업훈장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 유일한 유한재단 설립 |
추모 시기/일시 | 1971년 - 유일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3월 11일 - 유일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유일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유일한 출생지 - 평안도 평양 |
학교|수학지 | 평안도 선천 사립학교 - 평안도 선천 |
학교|수학지 | 미시간주립대학교 - 미국 미시간주 |
학교|수학지 | 남가주대학교 대학원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활동지 | 유한양행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
묘소 | 유일한 묘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경인로 8[항동 1-7] |
성격 | 기업가|교육가|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
성별 | 남 |
본관 | 진주유씨 |
대표 경력 | 유한양행 설립 |
[정의]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있던 유한양행을 설립한 기업가이자 교육가,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
[개설]
유일한(柳一韓)[1895~1971]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사람들의 보건을 해결하기 위해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여 정직한 기업 활동을 한 기업가이며,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긴 교육가이자 사회사업가이다. 결국 유언에 따라 유한공업전문대학[현 유한대학교]이 설립되었다.
부천 지역에서 유일한과 관련한 곳은 인근의 유한공업고등학교와 부천시 괴안동 사이 ‘유일한로(柳一韓路)’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이다. 유일한로는 2004년 4월 23일 국내에서는 최초로 기업인의 이름을 별칭으로 붙인 도로이다. 부천시는 경인고속국도의 부천 구간 6㎞를 ‘유일한로’라고 부르기로 하고 유한대학교 도서관에서 선포식을 가졌다. 부천시 관계자는 “국도 명칭을 지방자치단체가 바꿀 수 없어 별칭을 붙이기로 하였다.”라며 “시가 발간하는 관광 안내도 등에 이를 표기해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하였다.
[가계]
자는 천여(天汝),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 유기연(柳基淵)과 어머니 김확실(金確實)[개명 후 김기복] 사이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일찍이 개화한 인물로 유일한이 태어날 당시 싱거(Singer) 미싱 대리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남매는 유중한(柳仲韓)·유선한(柳善韓)·유명한(柳明韓)·유신한(柳信韓)·유동한(柳東韓)·유순한(柳順韓)·유특한(柳特韓)으로, 이 가운데 유명한과 유특한은 각각 유한양행의 2대, 4대 사장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미시간주립대학교[Michigan State University]를 졸업하고 코넬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한 미국 최초의 동양인 여성 의사 호미리(胡美利)이다. 자녀는 1남[유일선] 1녀[유재라]를 두었다.
[활동 사항]
평양에서 출생한 유일한은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양필(鄭良弼)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9년 미시간주립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유일한은 같은 해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에 재미한국인 대표로 참가하였다. 유일한은 기초작성의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
이후 유일한은 1926년 12월 10일 서울시 종로2가 덕원빌딩에서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6년에는 주식회사로 전환하였고, 당시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25번지에 제약 실험 연구소 및 공장을 건설하였다. 기업은 종업원의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주식회사 유한양행은 종업원들에게도 액면가의 10%에 해당하는 주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국내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종업원 주주제를 시행한 것이다. 유일한은 또한 경영의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1962년에 약업계로서는 최초로 주식 공개를 단행하였다.
유일한은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 활성화에 전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힘쓰고자 하였다. 유일한은 1941년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 사업을 추진하고,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 데에도 후원하였다. 아울러 1944년에는 잡지 『Asia and the America』[아시아와 아메리카]에 「Do Business with Korea」[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Hot Spring)에서 태평양 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하였다. 1945년에는 항일 무장 투쟁 계획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종전으로 무산되었다.
광복 후 유일한은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이듬해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하여 상공업 재건에 앞장섰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다. 이후 1953년 귀국하여 전후 복구 작업에 앞장섰으며, 유한양행은 1950년대 말 한국 최대의 제약 회사로 부상하였다.
한편 유일한은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는 개인이나 가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기(公器)이며 국가에 의한 보호와 사회의 협조로 기업 이윤을 올렸으므로 그 결과는 당연히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념에 따라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였고, 1957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폐지하고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1957년 한국직업학원, 1963년 한국고등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62년에는 부천군 소사읍 벌응절리 3-2번지에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하였고, 1964년에 학교법인 유한학원으로 변경하였다.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78년 유한중학교를 폐교하고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유한공업전문학교는 이후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1991년 유한전문대학, 1998년 유한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2022년 현재 유한대학교의 소재지는 부천시 경인로 590[괴안동 185-34]이다.
유일한은 1971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유언장에서 유일한은 생전에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당시 가격 2억 5500만 원] 전부를 유한중고등학교 재단이 세운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여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 사업에 쓰도록 할 뜻을 밝히고, 직계가족인 딸 유재라에게 오류동 유한중고등학교 교내이자 자신의 묘소가 있는 1만 6529㎡[5,000평]의 대지를 상속하여 ‘유한동산’으로 꾸미도록 부탁했으며, 손녀 유일링[7세]이 대학까지 학자금으로 쓰도록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1만 달러[당시 320만 원 상당] 정도를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미국에 있는 장남[유일선]에게는 일체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고 “너는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만을 남겼다.
[저술 및 작품]
소년기 회고록인 『When I was a boy in korea』[한국에서의 소년 시절]이 1928년 미국에서 발행되었다.
[묘소]
유일한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경인로 8[항동 1-7] 유한공업고등학교 교내에 조성된 유한동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일한은 생전인 1968년 동탑산업훈장,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무궁화장을 받았다. 사후인 1991년 중앙대학교에서 ‘참경영인상’에 선정되었다. 1995년에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선정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1998년 『조선일보』와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로 선정되었다. 1999년에는 『월간조선』이 선정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1위에 선정되었다.
부천시는 유일한이 1936년에 지금의 부천시 심곡동 일대에 근대적 제약 공장을 지어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99년 ‘부천시를 빛낸 공덕 인물’로 선정하였다. 부천중앙공원에 유일한 동상을 세워 유일한의 생전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