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2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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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善 |
영어음역 | Bak Dongseon |
이칭/별칭 | 자수(子粹),서포(西浦),정헌(貞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남달우 |
[정의]
조선 중기 부평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사간(司諫)을 지낸 박소(朴紹)이며,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이다. 외조부는 김희려(金希呂)이며, 부인은 청성군(淸城君) 이걸(李傑)의 딸이다. 형은 박동현(朴東賢)이며, 아들은 금주군(錦州君) 박정(朴炡)이다.
[활동사항]
박동선은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90년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7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병조좌랑을 거친 뒤 남포현감으로 이몽학(李夢學)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서 박동선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켰다. 그 뒤 성균관전적,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거쳐 경기도사, 수안군수에 이어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06년(선조 39) 3월 부평부사로 부임하였다가 1607년 8월에 병으로 인하여 남양부사로 이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사양하였다가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대사간이 되었으며 다음 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란 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 교동, 호서 등지로 피란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서포기문(西浦記聞)』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