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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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希亮 |
영어음역 | Jeong Huiryang |
이칭/별칭 | 순부(淳夫),허암(虛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남달우 |
[정의]
조선 중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부친은 철원부사를 지낸 정연경(鄭延慶)이다.
[활동사항]
정희량(鄭希良)[1469~?]은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 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황해도 해주에 유배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 김전(金詮), 신용개(申用漑),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받을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 대교에 임용되어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에 근면할 것, 간언을 받아들일 것,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을 절제할 것 등을 주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행예문관 봉교로서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 사초 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 등에 의하여 신용개, 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대, 유(流) 3,000리의 처벌을 받고 함경도 의주에 유배되었다.
1500년 5월 경상남도 김해로 이배되었다가,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대간, 홍문관직에는 서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어머니가 죽자 경기도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