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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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巖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사현 |
건립 시기/일시 | 1610년 - 화암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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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86년 - 화암서원 화암(華巖) 액호(額號)를 받음.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45년 - 화암서원 화재로 소실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53년 - 화암서원 복원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화암서원 사원 철폐 정책으로 훼철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2년 - 화암서원 재건 |
이전 시기/일시 | 1959년 - 화암서원 이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 화암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지정 |
현 소재지 | 화암서원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 |
성격 | 서원 |
양식 | 맞배지붕[사당]|팔작지붕[동재]|팔작지붕[서재]|팔작지붕[강당] |
정면 칸수 | 3칸[사당]|2칸[동재]|3칸[서재]|4칸[강당] |
측면 칸수 | 2칸[사당]|2칸[동재]|2칸[서재]|2칸[강당]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액 서원.
[개설]
화암서원은 이지함(李之菡)[1517~1578], 이산보(李山甫)[1539~159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1610년(광해군 2) 보령시 청라면에 세운 서원으로, 1686년(숙종 12)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지함, 이산보와 함께 이몽규(李夢奎)[1510~1563], 이정암(李廷馣)[1541~1600], 구계우(具繼禹)[1558~1620] 등 5인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배향인물]
이지함은 조선 중기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치(李穉)[1477~1530]이다. 서경덕(徐敬德)[1489~1546]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3년 조정에 천거되었다. 저서에는 『토정비결(土亭秘訣)』과 『농아집(聾啞集)』 등이 있다. 충청남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령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姜)이다.
이산보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이다. 이색의 후손으로 이지무(李之茂)의 아들이다.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사사받았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정랑(吏曹正郎), 종부시정(宗簿寺正),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보령의 화암서원,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몽규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다. 아버지는 이인신(李仁臣)으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종실인 이모부 이린(李磷)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태어나 13살 때 박상(朴祥)[1474~1530]의 문하로 들어가 약관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얼마 있지 않아 나왔다. 1547년(명종 2) 처가의 별장이 있는 보령으로 이주하여 ‘천휴당(天休堂)’이라는 집을 짓고 독서와 시 짓기에 전념하였다. 1563년(명종 18)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정암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에 오르고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郎), 양주목사(楊州牧使), 동래부사(東萊府使), 이조참의(吏曹參議),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할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1600년 사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구계우의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호는 수암(睡庵)이다. 수몽(守夢) 정엽(鄭曄)[1563~1625]과 함께 화암서원 창건을 주도하였다.
[위치]
화암서원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있는 오봉산의 남쪽 줄기를 따라 청천저수지가 만나는 곳에 있다. 청라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4.2㎞ 떨어져 있다. 청라면사무소에서 내원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옥계리로 가다 보면 정동교에 이르게 된다. 정동교에서 장산리 방향으로 저수지를 따라 난 길로 약 1.2㎞ 가면 화암서원이 있다.
[변천]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 2) 충청도관찰사이던 정엽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청라동 옥계에 건립하였다. 1624년(인조 2)에 토정 이지함, 명곡 이산보를 배향하였다. 1681년(숙종 7) 서원의 사액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당시 서원 청액(請額) 상소의 만연함과 이지함, 이산보 등 배향 인물이 다른 서원에 이미 배향되었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1686년(숙종 12) ‘화암(華巖)’의 액호(額號)를 받아 사액되었다. 이때 제문은 화암서원지(花巖書院誌)에 전하며 만정(晩靜) 서종태(徐宗泰)[1652~1719]가 짓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글을 썼다. 1723년(경종 3) 천휴당 이몽규(李夢奎)를 추향하였다.
1845년 화재로 서원이 소실되고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다. 이지함의 후손 이장찬(李章贊)[1794~1860] 등 유림이 주도하고 보령현감의 재정 지원으로 1853년 서원을 복원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정책으로 1868년 화암서원이 훼철(毁撤)되었다. 관련 기록은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1871년 8월 22일 기사에 있다. 서원 철폐 후 1898년에 단과 비를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1922년에 이지함, 이산보, 이몽규의 후손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와 경주 이씨(慶州 李氏)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서원을 재건하였는데, 이때 이정암이 배향되었다. 서원 지역이 청천저수지 건립에 따라 수몰 지역이 되어 1959년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1971년 화암서원 창건을 주도한 구계우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형태]
화암서원은 청라면 장산리에 있는 오봉산의 남쪽 줄기가 끝나는 곳으로 청천저수지와 접해 있는 언덕에 있다. 현재의 화암서원은 서원 앞에 있는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 이건한 것이다.
서원 건물은 구릉지에 가로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전면에 있는 정문으로 들어서면 작은 중정(中庭)이 있다. 중정 북편의 언덕에 사당을 배치하였다. 중정 좌우에는 각각 동재와 서재가 있다. 서재 뒤편으로는 관리사와 강당이 차례대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풍판(風板)이 있다. 최근 ‘숭덕사(崇德寺)’ 현판을 걸었다. 동재(東齋)는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화암서원 이건기와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西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현재 관리인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1988년 신축하였으며 현재 ‘강륜당(講倫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서원 구역 내 가장 서쪽에 있다.
[현황]
화암서원은 1984년 5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화암서원과 관련해 남아 있는 자료는 1847년 작성된 『화암서원선생안(花巖書院先生案)』, 1922년 작성된 『화암서원선생안(花巖書院先生案)』, 『심원록(尋院錄)』 등 전적류와 1964년 작성된 「화암서원중건기」, 「화암서원보수기」 등 현판류, 화암서원유허비 등 비석류가 있다.
[의의와 평가]
화암서원은 충청남도 지역에서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이어 세 번째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보령 지역 최초의 서원으로서 의미가 있다. 또한, 보령 지역의 유림 활동 및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 보존과 활용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