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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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水 黃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문광균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60년 - 황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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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592년 직후 - 황즙, 충청남도 보령 남포면 입향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13년 - 황즙 사망 |
본관 | 장수 - 전라북도 장수군 |
입향지 | 장수 황씨 - 충청남도 보령 남포면 |
묘소|세장지 | 황즙|황정직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성씨 시조 | 황경(黃瓊) |
입향 시조 | 황즙(黃葺) |
[정의]
황즙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의 이거 성씨.
[개설]
장수 이씨(長水 黃氏)는 황경(黃瓊)을 시조로 하고, 황즙(黃葺)[1560~1613]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의 이거 성씨이다.
[연원]
황경은 신라 경순왕(敬順王)[?~979]의 사위로 시중(侍中)[신라 때 집사성의 으뜸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황경이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진 황을고(黃乙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현재 장수 황씨 문중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후 10세손 황공유(黃公有)가 고려 명종(明宗) 대 전중감(殿中監)으로 이의방(李義方)[?~1174]의 난을 피하여 전라도 장수로 낙향하였고, 15세손 황감평(黃鑑平)이 후학을 위한 덕망 있는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특히 이조 참의를 역임한 18세손 황석부(黃石富) 이후에는 고증할 자료가 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중시조(中始祖)[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로 하고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황석부는 황희(黃喜)[1363~1452]의 증조할아버지로 사후에 호조 참의로 추증(追贈)[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장수 황씨는 호안공파(胡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열성공파(烈成公派)로 나누어졌는데, 황즙이 충청남도 보령으로 입향하였다.
[입향 경위]
입향조 황즙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을 피하여 호서의 비인현 저동[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으로 낙향하였다. 이곳을 택한 까닭은 황즙의 처가인 풍천 임씨가 이미 저동에 입향하여 정착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 시대 거주지 이전의 전형적인 형태인 외가나 처갓집 근처로의 이동이었던 것이다. 황즙의 아들 황정직(黃廷直)[1582~1657]은 아버지의 묘소를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에 정하고, 비인 저동을 떠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 정착하였다.
[현황]
2015년 통계지리정보서비스 본관 인구 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장수 황씨 64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입향조 황즙과 아들 황정직의 묘소는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