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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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志定草書醉詠九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승은 |
저술 시기/일시 | 1647년 5월 -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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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0년 10월 25일 -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 보물 제1668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 보물 재지정 |
소장처 | 개인 소장 - 경기도 과천시 |
성격 | 서첩 |
저자 | 이지정 |
권책 | 1첩[20면] |
규격 | 15.5㎝[가로]|27.7㎝[세로]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이지정이 1647년(인조 25)에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서호에서 쓴 서첩.
[개설]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은 이민구(李敏求)가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며 쓴 시를 절친한 친구 이지정(李志定)[1588~1650]이 초서로 쓴 서첩이다.
[저자]
이지정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정오(靜吾), 호는 청선(聽蟬)이다. 1616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예조 좌랑, 춘추관 편수관 등을 거쳤다. 인조반정 이후 외직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1642년(인조 20) 사위 이계(李烓)의 밀무역에 연좌되어 성천부사(成川府使)직에서 파직된 후 아산 인근 계두리(鷄頭里)에 거처하며 아산에 유배 온 이민구와 깊이 사귀었다.
[편찬/간행 경위]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 서첩의 글씨는 이민구가 1647년(인조 25)에 사면되어 서울로 떠나기 전 공세리 서호(西湖)에서 이민구가 시를 짓고 이지정에게 휘호를 부탁하자 이지정이 초서로 써준 것이다. "정해년(1647) 여름 5월 17일에 동주가 환어정(喚魚亭) 주인을 위해 취중에 절구 9수를 짓고 청선이 쓰다[丁亥夏五月十七日 東州爲喚魚亭主人翁 醉詠九絶聽蟬書]"라는 발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서지]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 서첩은 20면으로, 크기는 가로 15.5㎝, 세로 27.6㎝이다. 2010년 10월 25일 보물 제166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구성/내용]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의 칠언절구 8수는 「장차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서호에 배를 띄우고 취중에 절구 여덟 수를 지어 청선옹에게 붓을 휘둘러 줄 것을 청하다[將北歸泛舟西湖醉占八絶請蟬翁放筆]」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고, 오언절구 2수는 「소희를 읊다(賦小姬)」와 「배를 돌리다[舟回]」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취영구절(醉詠九絶)’이라는 제목과 달리 9수가 아닌 까닭은 이민구의 「소희를 읊다」가 후대의 장첩(粧帖) 과정에서 잘못 첨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호의 풍경과 그곳을 떠나며 절친한 벗과 이별하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지정은 17세기 전반에 글씨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며, 이민구 또한 당대의 명시인이다. 두 명사(名士)의 글과 글씨가 합쳐진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지만, 활달하고 거친 필법을 구사한 이지정의 개성이 돋보이는 서첩으로 서예사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