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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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璟宰 |
영어공식명칭 | Im Kyungjae |
이칭/별칭 | 원인(圓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홍구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 임경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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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95년 - 임경재 한성일어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임경재 광성의숙 강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임경재 휘문의숙 학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임경재 휘문의숙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1924년 - 임경재 휘문고등보통학교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임경재 동아일보 아산지국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임경재 동아일보 아산지국 고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임경재 온천리야학회 남자부 교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임경재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 고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임경재 온양중학원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 임경재 사망 |
출생지 | 경기도 포천군 |
거주|이주지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
학교|수학지 | 한성부 |
활동지 | 휘문고등보통학교 - 경기도 경성부 원동 |
활동지 | 동아일보 아산지국, 조선중앙일보 아산지국, 온양중학원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 |
성격 | 문인|교육자 |
성별 | 남 |
본관 | 풍천(豊川) |
대표 경력 |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장|조선어연구회 창립 멤버|아산군자치회 회장|온양중학원장 |
[정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문인이자 교육자.
[개설]
임경재(任璟宰)[1876~1955]는 본관이 풍천(豊川)이며, 호는 원인(圓人)이다. 1876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장을 역임하였고 조선어연구회 창립 멤버였다. 충청남도 아산의 문인이자 교육자이다.
[활동 사항]
임경재(任璟宰)[1876~1955]는 1876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거주하다가 1893년 한성으로 갔으며, 1895년 한성일어학교에 입학한 후 졸업하였다. 1907년 광성의숙(廣成義塾) 강사가 되었고, 전임강사를 거쳐 1909년 교명이 ‘광성’에서 ‘휘문(徽文)’으로 바뀔 당시 학감(學監)이 되었다. 1916년 휘문의숙장이 되었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가 되면서 교장이 되었다. 1922년 재단이사를 겸임하다 1924년에 사임하였으며, 그 후 아산으로 내려왔다. 한성일어학교 재학 당시 부기를 습득하여 휘문의숙 재직 당시 부기 책자를 편술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서 부기학 강사를 하기도 하였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창립에 앞장섰다. 조선어연구회는 스승이었던 주시경(周時經)의 영향을 받은 최두선(崔斗善)·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김윤경(金允經) 등이 주도하여 창립한 민간학회인데, 조선어 연구를 이끌었으며, 후에 조선어학회로 발전하였다. 당시 총독부 교과서 전문위원직을 맡기도 하였는데, 여러 언론에 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1920년대 초 조선체육회의 이사장으로 조선인의 체육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민립대학 기성회 등에도 참여하였다.
온양으로 내려온 후에는 동아일보 아산지국장을 잠시 맡았다가 이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고문을 맡으며, 지역 유지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군청 소재지인 온양면 온천리의 공립보통학교 설립 요청과 관련하여 온천리야학회가 만들어질 때 남자부 교수를 맡아 교육사업에 참여하였다. 1931년 현충사 중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묘소와 위토(位土)[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가 경매되는 상황에서 각계각층의 성금 모금을 권유해 경매 진행을 막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충사 중건에 힘을 보탰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아산군 자치회장으로 추대되어 일제가 물러난 공백을 채우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1946년부터 이듬해까지 사립 온양중학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신창여자실수학교와 합병하고, 남녀공학의 온양초급중학교로 승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온양초급중학교는 이후 6·25전쟁을 지나면서 온양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로, 1956년 온양여자중학교와 온양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도 아산 지역의 육영사업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1955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임경재는 휘문의숙에 있으면서 서적 간행에도 힘써 1908년에는 『간이상업부기』와 『신편은행부기학』 등 상업 관련 서적을 편술하였다. 또한 『중등생리위생학』 등의 서적들도 편역하였다. 1913년부터 이듬해까지는 『신문계』에 부기를 연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