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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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弼周 |
영어공식명칭 | Hong Pilju |
이칭/별칭 | 자은(紫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필준 |
[정의]
개항기 때에 활동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 세교리[현 배방읍 세교리] 출신의 항일운동가이자 교육자.
[개설]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규탄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가계]
홍필주(洪弼周)[1857~1917]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호는 자은(紫隱)이다. 모당공(慕堂公) 홍이상(洪履祥)의 9세손이다. 할아버지는 홍희락(洪羲洛)이며 홍재모(洪宰謨)의 둘째 아들이지만, 홍희락의 둘째 아들 홍가모(洪可謨)의 집안에 출계하여 양자로 들어갔다.
[활동 사항]
성균관에 입학한 뒤 1889년(고종 26) 입격(入格)[소과(小科) 또는 초시(初試)의 과거에 합격함]하여 이후 내부주사(內部主事), 안동부참사관(安東府參事官), 현풍군수(玄風郡守), 대구군수(大邱郡守),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고종 38) 관직에서 사임하고 1904년(고종 41)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 뒤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건하(李乾夏), 박기양(朴箕陽) 등과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반대 상소를 올리고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하여 일본을 규탄하였다. 1905년(고종 42)에는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日王)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게 한국의 독립 보장을 요구하는 동양평화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결성되자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고종 44)에는 나철,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5적암살단(五賊暗殺團)을 조직하여 을사5적[이완용(李完用), 박제순(朴齊純),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권중현(權重顯)]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8월 대한자강회가 탄압을 받아 해산되자, 이를 계승하는 대한협회(大韓協會)에 참여하여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의 편집인과 발행인을 맡아 발행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09년(순종 3) 대한협회가 친일화되고 일진회(一進會)와 연대를 도모하자 대한협회 활동을 중단하고 일진회를 규탄하는 국민대회를 열었다. 또한 1908년(순종 2) 설립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여 기호학교[현재 중앙고등학교] 학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