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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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曼 |
영어공식명칭 | Lee Man |
이칭/별칭 | 지만(志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기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사망한 문신.
[개설]
이만(李曼)[1605~1664]은 지방관으로 오래 있으면서 농사짓는 법 및 토질을 잘 가려내는 일에 탁월한 공이 있었으나 이재(理財)에 밝아 당시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시골집에서 사망하였다.
[가계]
이만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만(志曼)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형조참의 이목(李莯)이고, 어머니는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만은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대사간 정온(鄭蘊)을 옹호하다가 벼슬이 갈리었다. 이후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적극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았다. 병자호란 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계를 떠났고, 1639년(인조 17) 복직하여 교리(校理), 수찬(修撰) 등 청요직(淸要職)[삼사(三司)의 관리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으나 아버지도 상을 당하자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인조 22) 정랑(正郞)을 거쳐 승지가 되었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이어 도승지, 평안도관찰사,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병조참판, 황해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 완도의 국금지(國禁地)[나라에서 건물 설치를 금지한 땅]에 건물을 세워 치부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공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1661년(현종 2) 충공도관찰사(忠公道觀察使) 때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민가를 철거하고 훼손했다는 오해로 파직되었다가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추천으로 1662년(현종 3)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63년(현종 4)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인 『고재문집(顧齋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