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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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端錫 |
영어공식명칭 | Lee Danseok |
이칭/별칭 | 유초(有初),쌍호당(雙壺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기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문신.
[개설]
이단석(李端錫)[1625~1688]은 평소 언사가 준엄하여 남의 미움을 받게 되어 나주목사로 좌천되는 등 벼슬에 기복이 있었다. 가족이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할 정도로 청백리로도 이름이 났다.
[가계]
이단석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초(有初), 호는 쌍호당(雙壺堂)이다. 종실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후손으로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 전주이씨(全州李氏) 입향조(入鄕祖)인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 송파공(松坡公) 이생인(李生寅)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이제형(李齊衡),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 남두명(南斗明)의 딸이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유원(李有源)의 딸과 심지영(沈之瀛)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단석은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62년(현종 3) 정언(正言)이 되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문견록(聞見錄)을 작성하여 왕에게 올려 포상을 받았다. 지평(持平), 집의(執義) 등을 거쳐 1673년(현종 14)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고 이어서 육조(六曹)의 참의(參議)를 번갈아 역임하였다. 숙종 초에 외직에 나가 양주목사, 장단부사, 광주부윤을 지냈으며 1678년(숙종 4)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이후 전라도관찰사·성천부사를 거쳤으며, 문무를 겸했다 하여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그 후 충청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묘소]
이단석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단석은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713년(숙종 39) 전라도 영광 유림들이 세운 장천사(長川祠)[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표의사]에 1726년(영조 2) 아버지 이제형과 함께 추배되었다. 장천사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 철폐되었다. 이후 1903년 흠충경현비(欽忠景賢碑)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다. 1990년 장천사를 복원하면서 명칭을 ‘표의사(彪義祠)’로 변경하였다. 당시 이제형·이단석 부자의 위패는 후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함께 배향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