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95
한자 客舍
영어공식명칭 Guesthouse
이칭/별칭 관사,객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강경윤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었던 3개의 군현에 설치하였던 관사.

[개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읍치(邑治)[고을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의 중심이며 핵심시설이었던 관사(館舍)로,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객사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관아 시설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전망 또한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또한 관아 안에서는 가장 위압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충청남도 아산시는 조선시대 아산현, 신창현, 온양군이 합쳐진 곳이다. 3개의 군현에는 관아 시설이 각각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관아 시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사항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의 지리지·읍지 및 옛 지도를 통해 객사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회화식 군현 지도집 『해동지도(海東地圖)』, 편찬연대·제작자 미상의 종합 지도책 『여지도(輿地圖)』, 『1872년 군현지도』[조선 후기 지방지도] 등 각각의 고지도에는 객사가 있었던 각 군현의 읍치가 표시되어 있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아산현의 객사]

아산현의 읍치는 지금의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였다. 객사인 아주관(牙州舘)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영인초등학교 자리다. 아산현의 경우 태종 대부터 중종 대까지 100여 년간 폐현이 되고 다시 복구가 되는 등의 복잡한 지역이었다.

아산현의 관아 시설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조선 전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영조(題詠條)에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읍거흥체갱수우(邑居興替更誰尤)」에 객관의 기록이 나와 있다. "객관 수십 영(楹)만이 부질없이 날아들어, 뜬구름같이 지나간 일들이 나의 시름 자아낸다."라고 하여 객사 건물의 수십 개의 기둥을 표현하고 있다. 또 고적조(古跡條)에는 객사의 북쪽에 있던 여민루(慮民樓)의 창건에 대한 기록이 매우 상세하게 남아 있는데, 객사가 빈객과 사신이 묵기에 불편하여 여민루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에는 1415년(태종 15) 여름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이 아산지도(牙山地圖)를 호정공(浩亭公) 하륜(河崙)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외가가 아산이라고 하며 현감(縣監) 최안정(崔安正)의 공적을 칭송하고 여민루의 창건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유현이 하륜을 만났던 목적은 이 누정의 이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최안정은 1413년(태종 13)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노는 사람들을 모집해 재목과 기와를 만들게 하여 객사를 중건하였다.

이듬해에는 고을의 유력한 인물들을 불러 객사의 지대가 낮고 협소하여 여름이면 덥고 답답해 빈객과 사신이 불편하니, 누정을 짓는 것이 어떤가 제안하여 뜻을 이루었다. 이에 객사 동쪽 물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한 자리에 터를 잡았고, 아전과 백성들이 직접 사업에 참여하였다. 최안정이 현감으로 부임 당시 객사를 중건하면서 객사 인근에 여민루를 창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문인인 윤두수(尹斗壽)가 지은 『오음유고(梧陰遺稿)』에는 아산의 객사에서 차운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세서분도수궁(山勢西奔到水窮)[산이 생긴 모양은 서쪽으로 달리더니 물가에 이르자 멈추었고]

형진고현우추풍(荊榛古縣又秋風)[잡목이 무성한 옛 고을에는 또 가을바람이 부네]

남누종목지하처(南樓縱目知何處)[남쪽 누대(樓臺)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까지 바라보는데 어디인 줄 알겠으니]

십리어촌낙조홍(十里漁村落照紅)[저 멀리 어촌은 저녁 햇빛으로 붉네]

[신창현의 객사]

신창현의 읍치는 지금의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에 해당한다. 신창현의 관아 시설에 대한 기록도 역시 찾기 어렵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창현 누정조(樓亭條)에는 객사의 북쪽에 지었던 공북정(拱北亭)이 등재되어 있을 뿐이다. 현감 조침(趙琛)이 부임한 후 이전과는 고을 인심이 달라져 백성들이 업(業)에 충실하고, 관아의 일에도 열심히 하여 관청과 정자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공해조(公廨條)에는 각각 군현의 관아 건물 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객사를 살펴보면 아산군은 객사 30칸, 온양군은 객사 37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창현의 경우는 객사의 건물 이름이 자세히 보인다. 정청(正廳) 3칸, 동상방(東上房) 2칸, 말루(枺樓) 4칸, 서헌방(西軒房) 2칸, 말루(枺樓) 3칸, 낭청방(廊廳房) 5칸, 중대청(中大廳) 3칸, 하마대청(下馬大廳) 3칸 등 총 25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여타의 관아 건물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장대했음을 알 수 있다.

[온양군의 객사]

온양군의 읍치는 지금의 아산시 읍내동 일원으로 객사가 있던 곳은 지금의 온양초등학교 자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온양군 누정조에는 객사 동쪽에 있던 대청루(大淸樓)에 대해 언급되어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450년(문종 원년) 온양군사(溫陽郡事) 조욱(趙頊)이 객사를 수리하는 일로 인하여 백성들을 사역시킨 것이 폐단이 되어 추국당하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에 관아를 중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황]

전국 각처에 객사 건물이 다수 보존되어 있는 데 비해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객사 터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며 추후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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