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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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陽一洞 |
영어공식명칭 | Onyang 1-dong |
이칭/별칭 | 온천리,온천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경남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 속하는 행정동.
[개설]
온양1동(溫陽一洞)은 아산시의 중심지인 온양의 동(洞) 지역에서도 가장 중심인 온천동의 핵심 지역으로 아산시청 소재지이다. 온양1동은 온양 시가지를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온천대로[국도 제21호선]의 북쪽 지역으로 법정동인 온천동의 절반 가까이의 면적을 차지한다. 북쪽으로는 곡교천을 건너 염치읍 석정리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온양2동과 구분된다. 동북쪽은 온양3동의 권곡동, 모종동 지역과 맞닿고 서쪽은 온양4동의 실옥동, 방축동과 마주하고 있다.
[명칭 유래]
‘온양1동(溫陽一洞)’의 이름은 조선 시대 온양군(溫陽郡)에서 비롯되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이 통합되어 ‘아산시’라 칭하게 된 후 ‘온양’은 공식적인 행정구역 명칭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아산시 배방읍 장재리에 있는 경부고속철도 4-1 공구 역의 명칭을 정할 때 아산시와 천안시 지역 간의 갈등 과정 후 천안아산역[온양온천]으로 최종 명칭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에서 ‘온양’의 명칭을 되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2003년 옛 온양시 지역의 동 명칭을 ‘온양동’으로 통일하게 되면서 행정구역 명칭으로 되살아났다. 온양1동은 백제시대에 온정군(溫井郡) 또는 탕정군(湯井郡), 고려시대 온수군(溫水郡), 조선시대 온양군(溫陽郡)에 속하는 지역으로 ‘온천리’ 또는 ‘온천동’이라는 지명이 더 친숙한 곳이다.
[형성 및 변천]
온양1동은 조선시대에는 온양군 이북면(二北面), 말기에는 서면(西面) 온천리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옛 온양군 서면 하수리(下禾理)의 일부를 편입하여 그대로 온천리라 하였고, 아산군 온양면에 속한 12개 리 중 하나로 아산군 온양면에 속하게 되었다. 온양면은 1941년 10월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온천리는 이후 1~6구[리]까지 여섯 개의 구로 구분되었으며 현재의 온양1동은 그 중 온천리 1, 3, 5, 6구 지역이 되었다. 1986년 1월 1일에 온양시가 아산군에서 분리됨에 따라 이 4개의 구를 묶어 온양시 온천1동이 되었고, 1995년 1월 1일부터 온양시가 아산군과 다시 통합되어 아산시가 되면서 아산시 온양온천1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행정구역 명칭에서 사라진 ‘온양’을 되살려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2003년 9월 1일부터 온양온천1동을 온양1동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에 712년(성덕왕 11) 4월에 왕이 온양에 행차했다는 기록과 『고려사』에 1082년(문종 36)에 왕이 17일간 머물며 온천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1,300년 왕실 온천"이라는 표현이 생길 만큼 온양1동의 역사는 온천과 직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여섯 왕과 왕실 가족이 온양온천에 다녀갔으며, 세종 때 정식으로 온양행궁[온궁]이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 온천리는 45호 238명[남자 83명, 여자 155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인근 마을이 대개 10여 호인 것에 비하면 비교적 큰 마을이었으나 온양군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주민들은 주로 왕실의 온행에 각종 부역을 담당했고 때에 따라 술이나 곡식을 제공 받았다.
온양행궁은 1904년에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온양관이라는 여관으로 전락했고, 1905년 일제의 반식민지가 되면서 온천리 일대에 일본육군병원 온양분원과 금융조합 등이 들어서며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로 변해갔다. 1922년에 충남선[지금의 장항선] 철도와 온양온천역이 설치되고 1927년 온양관이 신정관으로 신축된 뒤 온양온천 일대는 아산군 전체의 중심지이면서 ‘조선 최고의 휴양관광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온천리는 6·25전쟁 초기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온양철도호텔[구 신정관]과 주변 상가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그 뒤 온양관광호텔의 신축과 민영화, 상가 재건축이 이루어지고 신정호[마산저수지]와 더불어 1960~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으며 인구가 증가해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된 후 온천1동으로 개편되었다.
[자연환경]
온양온천역 주변부는 해발고도 2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대로 일제강점기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거의 평지화되어 있다. 온양온천역 남쪽의 매봉재[151.7m]와 남산[170m] 사이에서 시작해 곡교천을 향해 북류하는 온천천 주변 평지에서는 논농사가 이뤄졌었다. 온천천은 온천관광 활성화로 온양관광호텔 주변이 상업지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복개되었다가 2015년 복원되었다.
[현황]
온양1동은 면적 1.43㎢에 17개 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9년 1월 기준 인구는 4,575가구에 총 9,859명으로 남자가 5,131명, 여자가 4,728명이다. 온양온천역과 온천대로[국도 제21호선]를 경계로 접하고 있어 1920년대 이후 아산시의 행정, 경제, 문화,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온양온천역을 기준으로 북서부에는 온양관광호텔과 온양고등학교가, 역 광장 동북부에는 옛 온양중학교 자리의 온양그랜드호텔과 온양온천초등학교가 있다. 온양온천역 광장 정면 북쪽으로는 전통시장과 각종 상가, 약국, 병원 등이 모여 있으며 아산고등학교 인근에 1997년에 준공 및 이전한 아산시청이 있다.
온천 도시 아산에 걸맞게 온양1동을 중심으로 관광호텔과 대중탕이 모여 있다. 이 가운데 신정관 온천탕은 온양온천 제1호 원탕이고, 한국인 최초로 온천공 개발에 성공한 이관형이 1960년에 지은 신천탕은 2005년 최신시설로 새롭게 단장해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강탈당해 온천 유흥의 중심지로 전락한 온양행궁[당시 신정관]은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며 주요 시설이 파괴되었으나 그 자리에 세워진 온양관광호텔 경내에 조선시대 임금의 온궁행차와 관련된 영괴대, 영괴대비, 신정비 등이 남아 있어 왕실 온천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온양1동은 1941년 온양읍 승격 이후 오랜 도시화의 과정에서 원도심의 침체를 겪기도 하였다. 온천대로를 경계로 온양1동과 접하고 있던 온양2동의 시외버스·고속버스 터미널이 1989년에 온양3동의 모종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1989년 소방서가 모종동으로, 2007년에 온양경찰서가 온양6동의 풍기동으로, 2011년에 등기소와 아산시법원이 온양5동의 용화동으로 이전하는 등 주요 기관의 이전이 뒤따랐다. 게다가 배방읍과 탕정면에 아산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구도심 침체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활성화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온양온천시장은 2008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온양온천역 개통과 더불어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구 경찰서 자리에 시민문화복지센터가 들어서 공영주차장이 확장·개설되고, 시장 통로의 비가림 시설 설치, 무료 족욕 체험장인 ‘소원분수-건강의 샘’이 운영되면서 지역 특색과 이용 편의를 살린 재래시장으로 바뀌었다. 또한 온양관광호텔을 끼고 흐르며 하수도 역할을 했던 복개 하천 온천천의 약 1㎞ 구간에 생태 하천 복원 공사가 2015년 1월에 마무리되어 인근 주민의 새로운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온천천 복개 구간 주변은 일명 ‘장미마을’로 불리는 유흥지역으로 지역개발의 걸림돌이었다. 아산시에서는 꾸준한 단속 강화와 더불어 자진 폐업을 유도하고 매입한 모텔을 청년·여성 및 사회적 기업의 창업 공간으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에 2018년 8월 31일자로 국토교통부 도시 재생 뉴딜 사업 최종 대상지로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온양행궁과 온천탕, 전통재래시장과 깡통 골목의 창구대장간[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1-1호 대장장], 우시장, 밀냉면거리 등 삶의 숨결과 지역 정체성이 빼곡히 들어선 온양1동은 지방 혁신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