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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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侙 |
영어음역 | Jeong Chik |
이칭/별칭 | 중칙(仲則),우천(愚川),우천노인(愚川老人),소와(笑窩),와운옹(臥雲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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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성별 | 남 |
생년 | 1601년(선조 34) |
몰년 | 1663년(현종 4) |
본관 | 청주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칙(仲則), 호는 우천(愚川)·우천노인(愚川老人)·소와(笑窩)·와운옹(臥雲翁). 할아버지는 정두(鄭枓), 아버지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 어머니는 영춘이씨(永春李氏)로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의 딸이다.
[활동사항]
정칙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가정에서 수업한 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외삼촌 이민환(李民寏)을 따라 문예를 익혔다. 광해군조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독서와 문장 수련에 힘쓰다 인조반정 이후인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후로 15차례나 대과에 응시하여 향시에 2번씩이나 장원했으나 예부시(禮部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와 강화한 후 이듬해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한 뒤 대명절의를 부르짖고 바로 귀향하여 남간정(南磵亭)을 지어 그 안에 작은 방을 소와(笑窩)라 이름짓고 은거에 들어갔다. 만년인 1654년 무렵 뜻을 이루지 못해 재차 영주 남쪽으로 이거하였다. 학가산(鶴駕山) 북쪽 지맥이 중간에 끊어졌다 다시 솟아올라 이루어진 달미산(고학) 우천(愚川)이란 곳에 우천정(愚川亭)를 짓고 우천노인(愚川老人)이라 스스로를 불렀다.
또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모방하여 「우천은자전(愚川隱者傳)」을 지어 은둔할 뜻을 보이고 문묵(文墨)으로 자오(自娛)하였다. 당시에 10리 떨어져 생활하고 있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가장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부탁으로 『소미통감(少微通鑑)』을 개정하다가 끝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우천집(愚川集)』 7권 3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