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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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山柳氏水洞齋舍 |
영어음역 | Pungsallyussi Sudong Jaesa |
영어의미역 | Sudong Memorial House of Pungsan Ryu Clan |
이칭/별칭 | 상로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 50[수석길 6-8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천근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11월 1일 - 풍산류씨수동재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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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풍산류씨수동재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재사 |
건립시기/일시 | 1611년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 50[수석길 6-89] |
소유자 | 류영하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있는 조선 중기 풍산류씨 가문의 재사.
[위치]
안동시 풍산읍 수리 50번지[수석길 6-89]에 위치한다. 풍산과 안동 사이 국도에서 풍산읍의 동쪽 경계 부분과 안동시의 서쪽 끝 송야교 부분을 이어주는 길로 들어서면 중간쯤 되는 지점에 수동이 있다. 수동은 풍산들의 서북쪽 한 끝을 호선으로 감싸고 있는 산자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수동마을 뒷산에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묘소가 있다. 풍산류씨수동재사는 류성룡의 묘소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떨어져 각각 다른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풍산류씨수동재사는 류성룡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류성룡의 아들 류초는 『류천선생유고(柳川先生遺稿)』의 「상로재기(霜露齋記)」에서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후 5년이 되는 1611년(광해군 3) 승려 포우의 도움으로 재사를 짓고 ‘상로재’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적고 있다. 1600년대 초반에 2칸으로 지었던 것을 1600년대 중반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증축했다는 것이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재사의 초기 형태는 다음의 일절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력 정미년(1607년)에 우리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체를 수동 산에 모셨다. 이곳은 새로 잡은 터이다. --- 산 밑에 집을 지어 묘소를 수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평소부터 잘 아는 포우라는 스님이 우리의 생각을 알고 건축에 착수하였으나 힘이 부족하여 5년 만에 겨우 두 칸을 마련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에게 이르기를, “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옛날부터의 법도이니 그대가 이름을 짓도록 하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서리 ‘상’과 이슬 ‘로’ 두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기로 하였다. 『예기』에 ‘봄에 이슬이 촉촉이 내리거나 가을에 서리가 내릴 때마다 그리워한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상은 「상로재기」에 보이는 일절이다.
[형태]
‘口’자형 목조고가로 상로재(霜露齋)라고도 부른다. 재사의 남쪽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1칸이다. 이 건물은 비대칭의 자유로운 건물로 자유로운 미학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건물의 칸 수는 여덟이지만, 칸마다 넓이가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중앙에 대문을 두고 동편으로는 3칸, 서편으로는 4칸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것도 좌우대칭의 비례를 갖추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대문은 두 쪽 나무판이다. 문턱은 가운데가 아래로 굽은 호선 형상의 목재이다. 두 기둥 사이에 사각형 목재 문설주를 세우고 문턱 역시 같은 규격의 목재로 가로질렀다. 문턱 위쪽으로는 좁직한 틈을 마련하고 목재의 살창을 박았다. 대문의 동쪽 세 칸은 각 벽면의 처리 방식이 다르다. 벽면을 가로지르는 횡목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도 조금씩 다 다르다. 벽면이 두 개의 횡목에 의하여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는 것만은 같다.
문의 바로 옆 칸은 벽면이 단순히 비슷한 비례로 3분되고 각 부분은 다 흙으로 메워졌다. 동쪽 3칸 중 가운데 칸은 문 옆 칸보다는 3분된 것 중 가운데 부분이 조금 높게 올라붙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작은 창문을 가설하였다. 아래쪽 기초 부분에는 두 개의 굴뚝이 보인다. 뜨락에 붙여 놓은 굴뚝은 대문 쪽으로 가설되었고, 배꼽 높이 정도로 돌을 쌓아 만든 굴뚝은 그 반대편 쪽으로 가설되었다. 동쪽 3칸 중 대문으로부터 가장 먼 쪽 칸은 3분된 벽면의 가운데 부분이 이번에는 셋 중 가장 낮게 내려앉아 있다. 기초 부분이 좁고 처마 부분이 넓어진 셈이다. 중앙 부분의 한가운데에는 두 쪽 나무문이 달렸다.
대문 서쪽 4칸도 칸의 넓이가 조금씩 다르고, 벽면의 꾸밈새가 다 다르다. 대문 옆쪽 칸은 처마 영역과 기초 영역을 각각 1로하고 중간 부분을 2로 하는 정도의 비례로 3분되어 있다. 이 벽면 분할의 비율은 제4칸, 그러니까 대문에서 가장 먼 칸의 그것과 같다. 이 칸 중앙 부분에는 작은 방문이 그 오른편 기둥에 붙여서 가설되어 있다. 창문보다는 크고 통상의 방문보다는 작은 쪽문이다. 이 칸의 뜨락 영역에는 대문 쪽으로 붙어서 눈높이 정도의 굴뚝이 만들어져 있다.
대문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제2칸은 역시 3분되어 있지만, 제1칸에 비해 중앙 부분이 좁다. 아래 두 칸이 위 한 칸보다 조금 넓은 정도이다. 이 칸의 중앙 부분에는 오른편 기둥 쪽으로 치우쳐서 조금 작은 규모의 직사각형 살창이 달려 있다. 살창과 같은 지점의 위 칸에는 머리통만한 크기의 원형 구멍이 뚫렸고, 간단한 살창이 박혔다.
제3칸은 위쪽 횡목은 제2칸과 같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아래쪽 횡목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추어져 있다. 이 칸의 중앙 부분에는 두 쪽의 나무판 문이 중앙에 달려 있다. 제4칸은 제1칸, 대문 바로 옆 칸의 벽면 분할과 같은 비례로 되어 있다. 중앙 부분에는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살창이 아래쪽 횡목에 붙어서 대문 쪽 방향을 향해 중앙으로부터 조금 치우쳐져 달려 있다. 이 여덟 칸의 벽면 구성에서 보이는 일종의 미학적 불협화음은 다양한 음조를 지닌다. 그것은 칸의 넓이와 벽면의 분할 비율, 횡목의 배치 위치, 창문의 크기와 모양, 주초석의 크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불협화의 미학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건물 정면 구조에서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기둥의 아래쪽 양편으로 기와를 끼워 넣어 벽을 만든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아래쪽 흙벽이 물에 젖었을 때 목재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있을 것이고, 건물의 주초 영역에 바람이 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 건물의 앞쪽 공간은 산록의 기울기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기울기는 중앙의 대문 계단을 기준으로 해서 오른쪽이 급하고, 왼쪽이 약하다. 이렇게 차이나는 경사면 위에 건물의 기단이 올라서 있으므로, 계단의 오른쪽으로는 축담을 2층으로 쌓고, 계단의 왼편으로는 축담을 1층으로 쌓아 기울기의 차이를 극복하였다. 오른쪽 축담의 제1층 아래편으로는 마당이 마련되어 있고, 위편으로는 제2층 축담과의 사이에 뜨락이 가설되어 있다.
이 건물은 1선의 지붕 구조를 갖추었다. 재사의 동편 건물은 이 건물과 지붕이 서로 맞물리며 이어지고, 서편 건물은 조금 떨어져서 중간에 또 다른 보조 건물을 두고 연결된다. 동쪽 건물의 솟은 지붕 측면 고매기 영역은 아래채 건물의 용마루 너머로 걸터앉아 있다. 용마루 선 앞쪽으로는 아래채 건물의 사선을 그리며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지붕선이고 뒤쪽으로는 동쪽 건물의 지붕 측면이 올라서 있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건물 안에서 보았을 때, 아래채 동쪽 끝 칸은 마구간의 쓰임새를 갖추고 있는데, 마구간의 지붕은 동쪽 건물채에 속한 것이고, 아래채 건물의 동쪽 끝 지붕은 안쪽에서는 동쪽 건물의 지붕선 아래로 파고들어 끝난다. 안에서 보았을 때 아래채의 동쪽 끝 칸은 이렇게 동쪽 건물채에 속한 구조를 갖추지만, 밖에서 보았을 때에는 아래채에 속한 목구조를 갖는다.
동쪽 밖에서 보았을 때는 지붕의 안으로 기우러진 서까래 구조가 동쪽 건물채의 지붕 아래쪽으로 복합적으로 가설되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동쪽에서 보았을 때 재사 건물은 전체 7칸의 규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아래쪽 제1칸의 목구조는 완전히 아래채 건물에 속한 것이므로, 동쪽 연결채는 전체 6칸 규모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재사 건물 동쪽 측면의 벽면 구조도 불협화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중간에 똑같은 벽면 구성을 한 두 칸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아래쪽 기초 영역이 기울게 처리되어 있어서 통일적 미학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지는 못한다고 하겠다. 재사 건물의 동쪽 기단면은 사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전체 7칸이 같은 각도의 기울기를 갖는 기단면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래쪽 칸은 지붕까지의 춤이 높고 위쪽 칸은 그 춤이 낮다.
동쪽 연결채 건물을 통해 볼 때, 아래쪽 제1칸은 아래채 건물의 끝과 연결된 마구간 영역인데, 위쪽에 다락을 둔 2층의 구조이다. 춤이 높으므로 2층 구조를 갖출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쪽 연결채의 아래로부터 제2칸과 제3칸은 방이다. 안에서 보았을 때 이 부분에는 폭 좁은 마루가 가설되어 있고, 간략한 형식의 난간이 붙어 있다. 이 두 칸의 위쪽으로는 한 칸의 마루가 있다. 바깥쪽 벽면은 흙으로 메워져 있고 중앙에 두 짝의 작은 나무판문이 달려 있는 마루이다.
이 마루면은 난간 쪽과 높이가 같다. 이 부분 위쪽으로 두 칸은 북쪽 건물채와 동쪽 건물체가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남쪽 건물채와 동쪽 건물채가 뒤섞여 마주 붙은 것과 같은 양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목구조는 동쪽 건물채에 속하지만 지붕은 북쪽 건물채에 속하고 기능도 북쪽 건물채에 속한 모습이다. 안에서 보았을 때 이 부분 두 칸 영역은 앞마루를 두고 있는 방으로 만들어져 있다. 앞마루는 바로 앞쪽의 마루 칸과 연결되어 있는데, 마루판의 높이가 서로 다르다. 앞마루 쪽이 마루 칸 쪽보다 20㎝ 정도는 높게 가설되어 있는 것이다. 앞마루는 북쪽 건물채의 마루판과 높이가 서로 같다.
북쪽 건물채는 정면 8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 제1칸의 방은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동쪽 건물채의 목구조를 갖추고 북쪽 건물채의 지붕을 이고 있다. 이 방의 위쪽으로 북쪽 건물채의 솟은 지붕 측면 구조는 동쪽 건물채의 용마루 끝을 밟고 올라앉아 있다. 그것 역시 아래채 건물의 용마루 위로 동쪽 건물채의 지붕 측면 구조가 솟구쳐 있는 것과 같다.
북쪽 건물채의 왼쪽 제2칸, 제3칸, 제4칸은 마루이다. 제5칸과 제6칸은 앞마루를 두고 있는 마루이다. 제7칸과 제8칸은 부엌이다. 부엌 영역은 풍산류씨수동재사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의 미학은 불협화음의 미학 정도로 표현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그것은 무신경하고 편의적이며, 어떤 미학적 고려도 하지 않고 있는 것 때문에 어떤 다른 미학도 초월하는 미학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부엌은 현재 비어 있는 상태이다. 불을 때는 아궁이와 북쪽 벽면의 한쪽에 중앙쯤 높이로 붙어 있는 선반이 이 공간의 쓰임새가 부엌이었다는 점을 알려줄 따름이다. 선반의 나무판은 마치 널뛰기판과도 같이 두툼하고 길쭉하다. 그것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부분적으로 풍화되어 부서져 있는 모습까지 보인다. 부엌의 북쪽 벽면과 서쪽 벽면에는 나무판 문이 달려 있다.
부엌 안에서 북쪽 건물로 올라가는 부분은 바닥면에 자연석 판석을 하나 깔고 역시 자연석 판석을 좁직한 폭으로 덧쌓아 돌계단을 만들었다. 그곳을 통하면 북쪽 건물의 마루로 올라서게 된다. 부엌에서는 또 서쪽 건물채의 앞마루 밑으로 동굴 같은 형태의 공간이 열려 있다. 어른 하나가 허리를 굽혀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이다. 이곳을 통하면 안마당으로 이르게 된다. 이 부분의 서쪽 건물 한 끝에 놓인 주초는 이 동굴 같은 통로의 허리춤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기도 하다.
서쪽 건물채는 뒤쪽으로 4칸의 건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1칸의 건물이 지붕 높이를 낮추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 또 지붕 높이를 낮추어 측문 칸, 그 아래로 조금 지붕 높이가 높은 아래 칸이 일선으로 늘어서 있다. 이 일곱 칸 영역 속에 4층의 지붕선이 어울려 있는 것이다. 측문 칸과 그 위쪽의 1칸은 아래쪽 건물채와 서쪽 건물채 사이의 틈을 메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뒤편의 네 칸 중 뒤의 두 칸은 북쪽 건물채의 부엌 영역이다. 부엌 영역의 돌계단을 통해 북쪽 건물채의 마루 위로 올라서면 그것이 동쪽 건물채의 마루와 맞물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쪽 건물 마루 끝의 기둥을 축으로 삼아 양쪽 마루의 사각형 끝 한 점이 맞물리듯 닿아 있는 것이다. 물론 두 마루의 높이는 서로 다르다.
서쪽 건물채의 마루는 동쪽 건물채의 마루와 같이 북쪽 건물채 마루와는 20㎝ 정도 아래로 가설되어 있는 것이다. 두 마루면의 꼭짓점이 맞물리는 점에는 각재 기둥이 서 있으므로 두 마루 사이는 자유롭게 통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조심스럽게 기둥을 돌아 펄쩍 뛰어야 다른 건물채의 마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북쪽 건물채의 뜨락을 통해 서쪽 건물채 마루로 올라서는 부분도 부엌에서 북쪽 마루로 오르는 부분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서쪽 건물채의 부엌 아래 두 칸은 반 칸 규모의 앞마루를 두고 있는 방이다. 이 건물채 앞마루 앞선으로는 난간이 가설되어 있다. 직선의 형상에 둥근 굴곡을 세 번 만들어 놓은 약식 안족(雁足)도 달려 있는 난간이다. 이 건물채 앞마루에서는 부엌 다락으로 올라서는 사다리형 계단이 북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
앞마루의 남쪽 끝은 그 아래채의 다락으로 들어가는 1칸 방문도 달려 있다. 안마당은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통상의 가정집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거대규모의 재사에 비해서는 작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북쪽 건물채는 높을 축담 위에 자리 잡고 있고, 축담의 중앙에는 제대로의 규모를 갖춘 계단을 배치하여 북쪽 건물채 뜨락으로 오르게 하였다. 북쪽 건물채는 중앙에 세 칸 마루를 두고 좌우로 2칸 또는 1칸의 방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현황]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류영하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체적으로 19세기 전후의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는 재사 건물로 옛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